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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호르무즈의 경고, 에너지 안보를 다시 짤 때

중앙일보

2026.03.10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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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이란 전쟁이 격화되면서 에너지 시장의 가장 민감한 경고등이 켜졌다. 세계 원유 해상 수송의 약 2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은 위기가 발생하는 순간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동맥 경화를 일으킨다. 한국 경제의 심장으로 들어오는 에너지의 관문이기도 하다.

미국의 셰일 혁명 이후 세계 에너지 시장은 안정적인 공급 환경 속에 있었고, 지정학적 변수는 과거처럼 장기적인 시장 충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주요 경제국들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탄소중립과 에너지 전환에 관심을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중동 긴장이 다시 고조되면서 이러한 공급 환경이 영구적인 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지난 10여 년의 안정은 하나의 착시에 가까웠다.

작동 멈춘 미국의 에너지 우산
에너지 안보 역량 스스로 갖춰야
정치적 성과주의론 번번이 실패
컨트롤 타워와 전문가 관리 필요

주목해야 할 변화는 미국의 위치다. 냉전 이후 미국은 중동 에너지 공급의 안전판 역할을 해 왔다. 카터 독트린 이후 페르시아만의 에너지 공급은 미국의 사활적 이해로 간주되었고, 미 해군은 사실상 호르무즈 해협의 항행 안전을 보장해 왔다. 그러나 미국이 에너지 자립에 도달하면서 중동의 위기는 더 이상 자국 에너지 수급의 직접적 위기가 아니다. 미국이 씌워주던 에너지 안보 우산은 더 이상 자동적으로 펼쳐지지 않는다.

섬처럼 고립된 수급 구조를 가진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와 첨단 제조업, AI 데이터센터 같은 신산업을 유지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에너지 안보 역량을 가져야 한다. 이는 특정 에너지원이나 가격만을 강조해서는 달성할 수 없다. 에너지 안보는 총체적 에너지 시스템의 역량으로 평가된다.

에너지 시스템은 축구 경기와 같다. 공격수, 수비수, 미드필더가 각각 다른 역할을 맡는다. 신재생에너지는 미래의 공격수로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전통적으로 기저전력을 담당해 온 석탄과 원자력은 수비수다. 빠른 출력 조절 능력을 가진 천연가스는 미드필더에 가깝다. 석유는 여전히 산업과 물류의 중심 에너지원으로 중앙에 남아 있다. 경기에서 이기려면 모든 포지션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이를 조율하는 감독의 역할이 정부의 책임이다.

에너지 정책과 환경 정책은 기후 대응이라는 목표를 공유하지만 작동 원리는 다르다. 환경 정책은 규범에 기반한 ‘보호’를, 에너지 정책은 실용적 변수 위에서 ‘사용’을 전제로 한다. 이 차이를 인정하고 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안보가 상호보완적으로 기능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왜곡을 막을 수 있다.

현재 한국의 에너지 시스템은 산업 구조 재편과 공기업 재무 구조라는 압력을 동시에 받고 있다. 글로벌 경쟁 강화와 공급 과잉, 그리고 수요 구조 변화는 석유 산업의 구조조정을 촉발한다. 한국석유공사는 여전히 심각한 재무 구조 하에 있다. 한국가스공사의 미수금은 약 14조 원에 이르고, 한국전력의 부채는 200조 원을 넘어섰다. 에너지 정책의 비용을 공기업에 쌓아두는 방식은 결국 국가 경제 전체의 부담으로 돌아오게 된다.

석탄은 장기적으로 축소될 에너지원이지만, 노후 석탄 발전소 폐쇄가 본격화되면서 고용과 지역경제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정의로운 전환’에 따르는 사회적 비용은 급속도로 증가하게 된다. 원자력 역시 탈원전과 복귀가 반복되면서 정책 일관성이 흔들렸고, 사용후 핵연료 저장 문제도 남아있다. SMR의 상업화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외부 공급 충격이 발생했을 때 시스템을 버티게 하는 것이 바로 에너지 안보다. 전환을 추진하더라도 각 에너지원의 역할을 현실적으로 점검하고 체질을 개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국제 유가 상승 국면에서 가격 통제나 유류세 조정은 단기적으로 소비자 부담을 완화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조치가 반복되면 시장 신호가 약화되고 투자 여력을 줄일 수 있음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에너지 가격이 정치적 변수에 영향을 받을수록 산업 경쟁력의 부담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

에너지 안보는 빛이 나는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작업은 빈틈을 메우는 일이다. 공급망을 점검하고 계약 구조를 관리하며 비축을 유지하고 산업 경쟁력을 지켜내는 일이다. 화려한 정책이 아니라 조용한 관리의 기술이다. 그래서 에너지 안보에는 정치적 조급성과 과시가 가장 위험하다. 과거 해외 자원개발 실패의 교훈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의지 부족이 아니라 정치적 성과주의였다. 국제 에너지 시장은 정치, 안보, 금융, 기술이 뒤엉킨 전쟁터다. 정치적 이벤트로 사진을 찍는 순간 협상력은 사라진다.

결국 필요한 것은 에너지 안보의 안정적인 컨트롤 타워와 전문가 중심의 상시적 관리다. 산업, 환경, 외교 정책이 따로 움직이면 에너지 안보는 작동하지 않는다.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은 하나의 경고다.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지금은 에너지원 경쟁력을 유지하고 국제 공조를 강화하는 한국형 에너지 안보 전략을 다시 설계할 때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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