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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롱뷰] AI가 뺏은 '축적의 시간'…주니어는 미숙련자로 남겨질 위기

중앙일보

2026.03.10 13:00 2026.03.10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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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롱뷰(The Long View)’는 멀리 보고, 깊게 생각하는 독자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경제 이슈의 본질과 맥락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땀과 시간으로 대변되던 인간의 노동가치가 데이터와 연산 속도 앞에서 재단되고 있다. 인공지능(AI) 보급 이후 두드러진 현상이다. 거의 전업종에서 그렇다.

모델과 성우가 꼭 등장하던 광고제작업을 보자. 한 AI 광고 제작사에 e-메일로 견적을 문의하자 30분 만에 답신이 왔다. AI 모델과 성우가 출연하는 10초 영상이 120만원, 30초 영상은 360만원. 배경·자막·효과음까지 포함된 ‘올인원’ 가격이다. 한 금융사 홍보 담당 임원은 “유명 모델을 쓰는 실사 영상은 10초에 수억원이 들기도 하고 한 달 이상이 걸리지만, AI는 1주일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숏폼 등 저가형 광고 시장은 이미 AI의 영토가 된 지 오래다. 모델은 물론 촬영 스태프, 메이크업 아티스트 등 관련 일자리가 위협받는 배경이다.

일거리는 남았지만, 입구는 사라진다
회계·세무·법률 분야 등 이른바 ‘사짜’ 직업도 예외는 아니다. 과거 저연차 변호사들은 밤새 판례를 찾으며 일을 배웠지만, 이젠 AI가 그 일을 대신한다. 대형 로펌의 한 고문은 “비용을 들여 초짜를 키울 유인이 사라졌다”고 전했다. 카를 마르크스가 환생한다면,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대체해 대량실업을 일으킨다며 펄쩍 뛰었을 법하다.

산업현장의 변화가 단순히 고용 감소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일거리는 남아 있지만 입구가 사라지고, 직업은 존재하지만 초보자는 들어갈 수 없는 구조가 돼간다. 그 결과 미래의 전문가 코스로 이끌 ‘경험의 사다리’가 치워지고 있다는 게 뼈 아프다.
이마트는 5000원 이하의 상품만 모아파는 5K프라이스를 론칭하면서 5000원권의 모델인 율곡 이이 선생을 AI동영상으로 구현해냈다. 유튜브 홍보영상 캡처

이는 개인의 취업난을 넘어 산업 구조 자체의 변화다. 숙련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사소하고 반복적인 초급 업무를 통해 축적된 경험이 숙련을 만들고, 그 토대 위에 전문가라는 꽃이 피어난다. 그런데 AI는 바로 이 중간 단계의 직무를 가장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기업은 사람을 교육하며 키우기보다 완성된 인력을 외부에서 찾는다. 내부의 성장 경로는 좁아진다. 결과적으로 노동시장은 허드렛일 하는 초보자와 소수의 고숙련자만 남고, 산업을 지탱하던 중간허리가 비게 된다. 산업은 상품만 생산하는 게 아니라 인력도 재생산한다. 내부에서 숙련이 축적되지 않으면 일정 시간이 지난 뒤에는 전문가 풀이 부족해진다. 그때 대처하기엔 이미 늦다.

AI는 결과를 주지만 ‘노하우’는 주지 않는다
과거 광고 제작 현장의 막내 스태프는 밤을 새워 소품을 준비하고, 무명 모델은 추운 날씨에도 카메라 앞에서 수백 번 포즈를 취하며 현장의 공기를 익혔다. 신입 회계사ㆍ세무사들도 산더미 같은 전표와 씨름하며 숫자의 흐름을 체득했다. 미래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수련 과정이었다. 이제 이런 기초적인 경험의 장을 AI가 장악해버렸다. AI는 결과를 내놓을 뿐, 그에 이르는 과정의 노하우는 공유하지 않는다. 현장에서 부대끼며 체득할 수 있는 암묵지(暗默知, 경험과 맥락을 내포한 비공식적 노하우나 지식)의 전승 통로가 끊긴 셈이다. AI가 숙련 형성 과정을 대체할 때 노동시장과 산업의 충격은 더 오래 갈 수 있다.

단순한 직무 변화에 그치지는 게 아니다. 신입이 경험을 통해 숙련으로 이동하는 경로가 막히면 노동시장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인력을 흡수하지 못한다. 과거에는 기업들이 일종의 훈련비용을 감당하며 낮은 생산성의 초급 인력을 채용했다. 그러나 AI가 그 구간을 제거하자 기업들은 처음부터 생산성을 낼 수 있는 경력자를 선호하고 있다. 그 결과 AI의 충격은 청년층의 진입 실패, 즉 구조적 고용 불안의 형태로 나타나는 양상이다.

아무리 AI가 완벽해도 현장에서 뿜어내는 베테랑 모델의 감정선을 흉내 내긴 어렵다. 온갖 시행착오를 토대로 복잡한 경영 전략을 제안하거나 법적ㆍ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고도의 의사결정도 대체하기 힘들다. 그에 비해 주니어의 학습과정은 AI가 수초 만에 내놓는 결과물 앞에서 고비용ㆍ비효율로 치부된다. 결국 이들은 성장 기회를 잃고, 영원한 보조자 혹은 미숙련자로 남을 위기에 처했다. ‘경험의 양극화’다.
한 AI 모델 제작업체 사이트. 고객이 선택한 AI모델을 원하는 의상·스타일·배경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한 실증연구는 이미 여럿 나왔다. 지난해 에릭 브리뇰프슨 스탠퍼드대 교수팀에 따르면 AI를 도입한 기업에서 경력 초년 인력의 채용이 급감한 반면 고경력자의 고용은 오히려 늘었다고 한다. 하버드대 경제학과 세예드 호세이니와 가이 리히팅거도 비슷한 시기에 같은 결과를 발표했다.

경력에 따른 AI의 차별적 영향은 한국에서도 통계로 확인된다. 한국은행의 지난해 10월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3년간 청년층 일자리는 21만1000개 줄었는데, 이 가운데 20만8000개가 AI 고노출 업종이었다. 챗GPT 출시 이후 컴퓨터 프로그래밍(시스템 관리), 출판, 전문 서비스, 정보 서비스 부문의 청년고용은 각각 11.2%ㆍ20.4%ㆍ8.8%ㆍ23.8% 감소했다. 반면 50대를 포함한 핵심 장기 경력자들은 종전의 고용 증가세를 유지했다. AI는 정형화된 주니어의 업무를 쉽게 대체한 반면, 경력에 기반한 암묵지나 대인관계가 필요한 경력자 업무엔 보완적으로 작동했다는 뜻이다.

사라지는 '경험의 사다리', 결과는 '경험의 양극화'
이 추세가 지속된다면 다소 비관적인 시나리오가 그려진다. 중장기적으로 한국 산업 생태계의 허리를 담당할 중견 전문가층이 증발해버릴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신관호 고려대 교수는 “경력 사다리의 첫 칸이 사라지면 후속 세대는 인적자본을 축적할 길이 막힌다”고 말했다. 세대 간 지식 전수가 끊기면 성장 동력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숙련된 전문가는 수많은 시행착오의 대가를 지불하고 길러지는 것이다. 당장은 AI가 그 비용을 0에 수렴케 만든 듯 보이지만, 실제론 청년 실업과 미래 인재 상실이라는 더 큰 비용 청구서가 날아올지 모른다.

그럼 지금 개별 기업의 합리적 선택은 훗날 산업 전체에 악영향을 주는 ‘구성의 오류’일까. 그렇다고 효율과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에게 무작정 주니어 인력을 키우라고 주문하기는 어렵다. 그럴 여유를 지닌 기업이 얼마나 있는지도 의문이다. 비용과 효율이라는 딜레마 구도에서 어떤 기업도 자유롭지 못하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벌어지면 모두들 정부가 나서길 바라곤 한다. 우리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정부의 정책 대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정부가 만능은 아니다. 이번엔 외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정부의 혁신 역량이 영 미더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부가 나서지 않도록 하는 게 더 나을 수 있다.
김경진 기자

한국만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미국ㆍ유럽에서 논의되는 정부의 AI 과세 방안을 보자. 고용이나 임금 감소를 보전하기 위해 AI로 이익을 많이 낸 기업에게 과세하자는 발상이다. 케빈 오닐 록펠러재단 총괄 매니징디렉터는 “AI 과세는 실업보험과 재교육을 강화하거나 더 광범위한 AI 정책 목표를 추진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이중과세일 뿐 아니라, 혁신에 페널티를 준다는 면에서 시대 흐름에 배치된다. 게다가 거둬들인 돈으로 정부가 뭘 할지도 알 수 없다. 대체로 정부는 혁신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 정부의 대책 역시 여전히 과거의 문법을 따른다. 청년도전지원사업, 청년 일경험 지원사업 등의 정책은 청년들에게 직업 훈련과 컨설팅을 제공하면서 취업을 도와준다. 일자리가 있는데, 기술이 부족한 청년의 미스매치를 해결해주는 게 중심이다. 정작 청년들에겐 취업의 입구조차 잘 안 보인다.

여기에 노동시장의 경직성은 상수화돼 있다. 강력한 해고 규제, 연공서열식 임금체계, 최저임금제 탓에 기업은 미경력 신입을 ‘고비용 위험자산’으로 간주하기 쉽다. 교육 비용과 낮은 생산성을 반영해 임금을 낮게 정하거나 고용관계를 신축적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제도를 바꾸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고용노동부 청년여성고용정책관을 지낸 김덕호 성균관대 겸임교수의 진단은 비단 AI에 국한되지 않는다.
김경진 기자

“대기업ㆍ정규직 인력은 고용을 보호받고, 임금은 근속연수에 따라 누적된다. 기업은 AI를 더 활용하게 되고, 신규채용에는 소극적이게 된다. 한번 뽑으면 정년까지 고용을 보장하는 경직된 노동 시장 구조를 개편해야 하는 것이 선결과제다.”

그의 말처럼 청년실업을 만드는 주범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다. 자발적 혁신과 노동, 그리고 유연한 시장의 움직임을 가로막는 법제도다.

AI를 통한 생산성 향상으로 경제가 선순환을 타고 성장할지, 전문가층 실종과 청년실업에 발목을 잡힐지는 우리의 적응 속도에 달려 있다. 근로자들이 생산성 향상에 맞춰 새로운 일자리와 산업으로 얼마나 원활히 이동하느냐가 관건이다. 우리의 경우 노동시장의 경직성, 가파른 고령화 등으로 그런 전환이 쉽지 않다.

노동시장의 경직성, AI 활용 더 부추겨
19세기 초 영국 노동자들이 기계에 일자리를 뺏길까 두려워 망치를 들었던 ‘러다이트 운동’의 결말을 복기해 보자. 당시의 우려와 달리 기계 도입은 새로운 서비스업 일자리를 낳았고, 공장과 유통망을 관리하는 ‘새로운 숙련공’의 시대를 열었다. 인류가 더 큰 풍요로 나아간 비결은 기계와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고 그에 걸맞은 사회 구조를 재설계한 데 있다.

AI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우리는 경제 주체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행동반경을 넓혀줘야 한다. 시장 유연화를 중심으로 한 노동개혁과 정부의 불필요한 간섭을 걷어내는 규제개혁이 그 출발점이다.

과제는 ‘공존의 비용’을 누가, 어떻게 분담하느냐에 있다. 노동계가 신규 진입자를 위해 얼마나 양보할지, 기업이 혁신의 과실을 인재 육성에 얼마나 재투자할지에 따라 우리 경제의 미래는 크게 좌우된다. 정부는 무엇을 ‘더 하겠다’고 섣불리 나서지 말고, 그 과정에서의 마찰을 줄이는 데 신경 쓰는 게 낫다.



손해용([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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