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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도 아닌데 대사가 눈앞에…공연장 등장한 ‘AI 자막 안경’ [비크닉]

중앙일보

2026.03.10 16:00 2026.03.1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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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한쪽, 오페라글라스 대여 옆에 ‘자막 안경 서비스 대여’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공연장에서 안경을 빌려준다는 것이 낯설면서도 궁금했다. ‘넷플릭스도 아닌데 안경에 자막이 나온다고?’ 직접 착용해 보니 궁금증이 해결됐다. 무대를 바라보는 순간 배우의 대사가 눈앞에 떠올랐다. 공연을 보는 동시에 자막을 읽는, 새로운 기술이 더해진 공연 관람 방식이다.

청각장애인의 일상생활을 위한 자막 안경 서비스 ‘씨사운드’를 운영하던 엑스퍼트아이엔씨는 한 고객의 요청을 계기로 공연용 자막 안경 개발에 착수했다. 사진 엑스퍼트아이엔씨

무대와 자막 사이, 놓쳐왔던 공연의 순간들
객석의 불이 꺼지고 무대 위 조명이 켜진다. 배우가 노래를 시작하면 공연장은 순식간에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관객들은 배우의 표정과 몸짓, 무대 연출을 따라가며 극에 몰입한다. 하지만 이런 공연의 감동이 모든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청각 장애인이나 한국어 대사를 빠르게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인 관객에게 공연장의 장벽은 여전히 높다. 일부 공연에서 번역 자막이 제공되기도 하지만 아직 많지 않은 데다, 자막이 있어도 대부분 무대 양옆 스크린에 표시된다. 관객은 공연과 자막 사이에서 시선을 계속 옮겨야 한다. 공연에 집중하려 할수록 자막을 놓치고, 자막을 보려 하면 무대 위 배우의 표정을 놓치는 일이 반복된다.

자막 안경을 쓰면 배우가 대사를 말하는 순간 렌즈에 자막이 나타난다. 공연시작 전 자막 안내가 나오는 모습. 사진 이지영 기자

최근 공연장에서는 이런 불편을 줄이기 위한 새로운 시도가 등장했다. 배우의 대사를 실시간으로 인식, 안경 렌즈에 자막으로 띄워주는 ‘AI 자막 안경’이다. 공연 중 배우의 음성이 인식되면 대사와 노래 가사가 자막 형태로 안경 화면에 나타난다. 이 안경은 AI 음성 인식 기술 기업 엑스퍼트아이엔씨(XpertINC)가 개발했다.

무대를 바라본 채 자막 읽는다
AI 자막 안경 ‘아울’을 직접 착용하고 공연을 관람해 봤다. 처음 안경을 썼을 때 느껴진 것은 예상보다 가벼운 착용감이다. 최근 도입된 무선 모델 기준 무게는 약 61g으로 오랜 시간 착용해도 큰 부담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존 안경 위에 착용도 가능하다.

공연이 시작되고 배우가 대사를 말하는 순간 마술처럼 렌즈 하단에 자막이 나타났다. 양안 시스루(See-through) 디스플레이 방식이 적용돼 실제 무대를 가리지 않으면서 자막을 표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자막의 위치와 크기도 조절 가능하며 배역 이름까지 제공돼 극을 관람하는 데 도움이 됐다. 안경에서 빛이 새어나가지 않아 주변 관객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특히 속도가 인상적이다. 배우의 목소리가 음악과 섞여 흐르는 상황에서도 자막이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업체 측에 따르면 자막 반응 속도는 약 0.2초에서 3초 이내다.

뮤지컬 ‘킹키부츠’가 공연되는 샤롯데씨어터에서 자막 안경 아울을 대여해준다. 사진 이지영 기자

공연장에서는 음악과 합창, 관객의 박수 등 다양한 소리가 동시에 발생한다. 일반적인 음성 인식 기술로는 이런 환경에서 정확한 인식이 쉽지 않다. 아울 자막 안경에는 공연 환경에 맞춰 개발된 음성 인식 엔진이 적용됐다. 배우의 실시간 음성과 사전에 등록된 공연 대본을 비교해 자막을 생성하는 방식이다.

무대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자막 스크린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점은 생각보다 큰 차이를 만든다. 자막이 무대를 바라보는 시야 안에 나타나기 때문에 공연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다. 관객들이 경험하는 것은 단순한 자막 서비스가 아니다. 극의 흐름에 맞춰 눈앞에 자연스럽게 흐르는 대사를 통해 관객들은 공연의 감동을 함께 나누는 새로운 방식의 관람을 하게 된다.

‘특정 회차’에서 ‘모든 관객’으로…배리어프리 공연의 변화
샤롯데씨어터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킹키부츠’ 관람에 자막 안경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사진 샤롯데씨어터

이 같은 변화는 공연계에서도 의미 있는 흐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동안 공연계에서 ‘배리어프리(Barrier-free)’ 공연은 대부분 특정 회차에서만 제한적으로 제공되는 경우가 많았다. 수어 통역이나 자막 공연을 별도로 운영하는 식이다.

AI 자막 안경은 특정 회차가 아닌 일반 공연에서 자막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공연 관람의 장벽을 낮춘다. 관람 접근성을 높이면서도 몰입을 크게 해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로 평가된다.

샤롯데씨어터 뮤지컬 ‘킹키부츠’, 대학로 공연장인 놀씨어터 대학로에서 공연된 연극 ‘은밀하게 위대하게’, 서울 백암아트홀에서 열린 ‘바이올리니스트 오주영 토크 콘서트’ 등 다양한 작품에서 자막 안경 서비스가 도입됐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러한 변화가 공연 관람 경험을 넓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샤롯데씨어터 관계자는 “국내 뮤지컬 시장의 성장에 발맞춰 K-뮤지컬에 관심이 높은 외국인 관객은 물론 청각 장애인 관객도 제약 없이 공연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자 했다”며 “이 서비스를 통해 우수한 K-뮤지컬이 한국을 방문하는 전 세계 관객들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현재 서비스는 도입 초기 단계임에도 매 회차 안정적인 수요를 보인다. 극장 측은 향후 외국인 관광객 비중이 높은 공연이나 글로벌 타깃 작품이 상연될 경우 이용률이 더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샤롯데시어터 자막 안경 대여 부스. 사진 이지영 기자

AI 자막 안경은 관객의 요구에서 출발한 기술이다. 청각장애인의 일상생활을 위한 자막 안경 서비스 ‘씨사운드’를 운영하던 엑스퍼트아이엔씨는 “공연장에도 이 기술을 꼭 도입해 달라”는 한 고객의 요청을 계기로 공연 환경에 맞춘 자막 안경 개발에 착수했다. 이후 2024년 국립극단 공연에서 처음으로 자막 안경 서비스를 선보였고, 현재는 해외 공연 시장 진출도 추진하고 있다. 회사 측은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 공연장 도입을 목표로 협의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박정남 엑스퍼트아이엔씨 대표는 “AI 자막 안경은 청각장애인이나 외국인 관객처럼 공연 접근에 어려움을 겪던 관객들이 공연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기술”이라며 “앞으로 공연장뿐 아니라 영화관이나 전시 공간 등 다양한 문화 시설로 서비스를 확대해 문화 접근성을 높여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무대를 바라보며 동시에 자막을 읽는 새로운 관람 방식. 기술은 공연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관객들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공연장은 더 많은 사람이 같은 이야기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조금씩 확장되고 있다.

b.이슈
비크닉이 흘러가는 유행 속에서 의미 있는 이슈를 건져 올립니다.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매력적인 공간을 탐색하고, 시대와 호흡해 성장하는 브랜드와 기업을 조명합니다. 비즈니스적 관점은 물론, 나아가 삶의 운용에 있어 유의미한 ‘인사이트’를 전합니다.



이지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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