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이라고는 하지만 강화도는 서구 문물을 먼저 받아들인 첨단 지역이었다. 현대사에서 비극적 삶을 살다 간 죽산 조봉암(曺奉岩·1898~1959·사진)의 고향이 이곳이다. 그는 독실한 감리교 신자로서 일찍이 권사(장로)의 직분을 맡아 신앙생활을 했다. 그런 그가 공산주의자가 되어 간첩 활동을 하다가 처형되었다. 여한이 많았을 것이다.
1980년대 어느 날, 한 중년 여성이 내 연구실로 찾아왔다. 단정했다. “누구시죠?” “죽산 조봉암 선생의 딸입니다.” 당대 최고 영화감독이었던 이봉래(李鳳來)의 아내 조호정(曺滬晶)여사였다. 나는 가슴이 먹먹하여 왜 오셨느냐고 묻지도 못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뒤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그 선친의 오랜 동료였던 최익환(崔益煥)의 사위이고 한국현대사를 전공했다니 선친의 신원(伸冤)을 위해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엄혹하던 군사 정부 시절, 한국현대사를 전공하고 알 만큼 안다 해도 병아리 교수가 도와줄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좋은 세상 올 때까지 좀 더 기다리시죠.” 처진 어깨로 연구실을 나가던 그 여인의 모습이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아 있다.
조봉암에 대한 논점은 세 가지인데 첫째로 ‘그는 공산주의자였는가?’ 하는 점이다. 그가 청년 시절에 모스크바 노동자대학을 졸업한 공산주의자였지만 박헌영(朴憲永)의 과격 노선에 반대하다가 민족주의 민족전선에서 제명되었을 때 이미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더욱이 고양·강화 일대에서 민족주의 지도자로 명성이 높던 이가순(李可順) 장로를 만난 뒤로 그는 공산주의를 버렸다. 이가순은 정(鄭) 트리오의 외할아버지이다. 아마도 역사적으로 평가한다면, 일제 치하와 해방정국에서 젊은 지식인들이 붉은 책 하나쯤은 유행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시절, 조봉암도 낭만적 공산주의에 심취했지만, 그는 “덜 한 공산주의자”였을 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