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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번째 천만영화가 일깨우는 것 [이지영의 문화난장]

중앙일보

2026.03.11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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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문화스포츠부국장
한 편의 영화에 전국이 들썩인다. 지난 6일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자 대통령이 직접 나서 “값진 결실”이라며 축하와 감사 메시지를 내놨다. 이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국가유산청장도 “우리 영화의 희망이자 축복” “감회가 남다르다” 등 축하의 뜻을 공개적으로 전했다. 국제영화제 수상 때나 볼 수 있었던 국가적 경사 대접이다.

투자·기대작 가뭄 속 기적 흥행
박찬욱 감독도 "큰일 했다" 축하
집단적 감동 경험 여전히 유효
작품 좋으면 기꺼이 극장 찾아
침체된 극장가에 희망으로 떠오른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포스터 이미지. [사진 쇼박스]
그만큼 목말랐던 것이다. 한국 영화시장은 2024년 4월 개봉한 ‘범죄도시4’ 이후 2년 가까이 천만영화를 배출하지 못했다. 지난해 최고 흥행작인 ‘좀비딸’조차 관객 수 564만 명에 그쳤다. OTT의 공세와 영화 티켓 가격 상승으로 이제 극장 시대는 끝났다는 비판론이 팽배한 상황이었다.

극장 관객 수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기점으로 크게 줄었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2022년부터 지난해까지 4년간 연평균 관객 수는 1억1600만 명 정도다. 팬데믹 이전 2015년부터 2019년까지의 연평균 관객 수 2억1840만여 명의 절반 수준이다. 시장이 위축되니 투자가 마르고, 투자가 줄면서 좋은 영화가 줄고, 볼만한 영화가 없어 관객이 외면하는 악순환이 굳어졌다.

대통령·장관도 축하 메시지
역대 국내 개봉작 중 34번째, 한국영화로는 25번째 천만영화에 이름을 올린 ‘왕과 사는 남자’는 이제 더이상 천만영화가 안 나올지 모른다는 체념 속에서 일궈낸, 일종의 기적으로 여겨진다. 박찬욱 감독도 장항준 감독에게 “큰일을 해내서 고맙고 축하한다”는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영화계가 내 영화 네 영화 따지지 않고 한마음으로 기뻐하고 있다.

한국 영화시장에서 ‘1000만’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흥행 기록이 아니다. 때로는 산업의 흐름을 바꾸는 이정표였고, 때로는 시장의 예측을 뒤집는 의외의 사건이었다. ‘이정표 천만’이 영화산업의 기준을 만들고, ‘의외의 천만’이 매너리즘에 빠진 업계에 경종을 울리며 한국영화는 지금의 규모와 다양성을 갖게 됐다.

차준홍 기자
한국영화 최초의 천만영화는 2003년 개봉한 ‘실미도’다. ‘실미도’의 천만 흥행은 한국영화가 비로소 산업으로서의 골격을 갖췄음을 선포한 사건이었다. 꼭 10년 전인 1993년 ‘서편제’가 세운 한국영화 최고 흥행 기록이 ‘서울 관객 103만 명’인 것을 생각하면, 천만 관객은 꿈꿀 엄두조차 못 낸 경지였다.

하지만 1998년 첫 등장한 멀티플렉스는 영화시장의 규모를 바꿔놨다. ‘실미도’에 이어 ‘태극기 휘날리며’(2004)도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천만’은 실현 가능한 목표가 된다. 한국적 서사와 대형 스펙터클이 결합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탄생은 거대 자본이 영화라는 산업에 확신을 갖게 만든 신호탄이 됐다.

2010년대는 한국 영화사에서 ‘천만영화 대량 생산기’로 불린다. 멀티플렉스 확장으로 스크린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천만 관객을 모을 수 있는 물리적 환경이 완성된 때였다. 대기업 배급사와 멀티플렉스의 결합은 스크린 점유율을 극대화해 단기간에 관객을 끌어모으는 흥행공식을 안착시켰다. 2012년 ‘도둑들’부터 2019년 ‘기생충’까지 8년 동안 14편의 천만 영화가 나왔다. 특히 ‘명량’(2014)은 관객 1761만 명을 동원, 시장 규모의 한계를 넘었다.

하지만 정형화된 흥행 공식이 늘 시장을 지배한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관객은 예상을 뒤엎는 선택으로 이변을 만들어냈다.

‘왕의 남자’(2005)는 톱스타 없는 저예산 사극이었지만, 광대의 서사와 시대적 한을 녹여내며 1230만 관객을 모았다. 가족애라는 고전적 코드를 통해 관객의 눈물샘을 터뜨린 ‘7번방의 선물’(2013)은 진부한 흥행 코드로 여겨졌던 휴먼 드라마의 저력을 보여줬다. 수사물과 코미디 결합이라는 평범한 포맷의 '극한직업’(2019)은 자극적 소재 없이 오직 재미만으로 1626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역대 한국영화 흥행 2위에 올랐다.

입소문 폭발한 영화에 관객 몰려
팬데믹 이후 천만영화의 반열에 든 여섯 편의 영화, ‘범죄도시’ 2·3·4와 ‘서울의 봄’ ‘파묘’ ‘왕과 사는 남자’는 영화시장이 확실한 경험을 소비하는 구조로 재편됐음을 보여준다. 이미 검증된 IP나 입소문이 폭발한 영화, 즉 관객으로서 실패할 확률이 없다고 믿어지는 영화만 천만의 반열에 올랐다. 마케팅보다 입소문, 실시간 관객 평판의 위력이 훨씬 커졌다. 관객에게 영화 관람은 시간 대비 효용을 꼼꼼히 따지는 특별한 외출이 된 것이다.

제작비 105억원 중예산 영화인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은 단순히 한 감독의 성공을 넘어, 극장가 부활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다.

스마트폰 하나로 전 세계의 방대한 콘텐트를 손쉽게 소비하는 시대지만, 관객들은 여전히 극장에서 타인과 함께 호흡하며 느끼는 집단적 감동을 기대하고 있었다. 자신을 매료시킬 이야기에 기꺼이 지갑을 열고 마음을 내어줬다. 엉성한 호랑이 CG도 그냥 웃어넘길 만큼 관객들은 너그러웠다.

관객을 다시 불러모을 열쇠는 오직 이야기의 본질에 있다. 관객의 마음을 읽는 날카로운 통찰과 탄탄한 서사가 있다면 천만이라는 기적은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 25번째 천만영화가 위기의 극장가에 증명해 보인 가장 확실한 생존 전략이다.



이지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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