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약품그룹의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가 새로운 대표이사로 황상연 HB인베스트먼트 프라이빗에쿼티(PE) 부문 대표를 내정했다. 최대주주인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과 경영간섭 문제로 정면 충돌했던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의 연임은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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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 만에 외부출신 대표
한미사이언스는 12일 이사회를 열고 박 대표를 포함해 이달 말 임기가 끝나는 한미약품 이사 4명을 교체하기로 했다. 황 대표 내정자는 서울대 화학과 학·석사 출신으로 미래에셋증권 리서치센터장, 알리안츠글로벌인베스터스 최고투자책임자(CIO), 종근당홀딩스 대표를 지냈다. 황 내정자가 오는 31일 열릴 주총에서 최종 선임될 경우 한미약품 최초로 ‘비(非) 한미맨’이 수장을 맡게 된다. 박 대표는 이사회가 끝난 후 입장문을 통해 “이번 임기를 끝으로 대표이사직을 내려 놓고자 한다”며 “한미의 근간인 ‘임성기정신’과 ‘품질경영’의 가치는 합심하여 꼭 지켜 달라”고 당부했다.
이번 대표 교체는 한미약품그룹이 오너가(家) 경영권 분쟁 1년여 만에 또다시 내홍을 겪으면서 촉발됐다. 지난 갈등 상황에서 한배를 탔던 ‘4자 연합’이 개인 최대주주 대(對) 창업주 가족의 대립으로 분열 양상을 보이면서다.
앞서 한미약품그룹은 지난 2024년 ‘모녀(창업주 배우자인 송영숙 회장, 장녀 임주현 부회장) 대 형제(창업주 장남 임종윤 사장, 차남 임종훈 사장)’간 경영권 분쟁을 겪었고, 창업주의 고향 후배이자 개인 최대주주인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이 최종적으로 모녀의 손을 들어주며 마무리됐다.
당시 신 회장과 송 회장 모녀, 사모펀드 라데팡스 파트너스로 구성된 4자 연합은 주주간 계약을 통해 지분매각 시 사전 협의ㆍ우선매수권 보장을 약속하고 이를 어길 시 600억원의 위약벌금을 물기로 약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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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이몽’에 갈등 폭발
하지만 지난해 7월 신 회장의 사업체인 한양정밀이 보유 지분을 담보로 380억원 규모의 교환사채를 발행하자, 모녀 측은 신 회장이 사실상 지분을 처분한 것이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양측의 갈등은 지난해 말 불거진 ‘경영 간섭’ 논란으로 폭발했다. 모녀 측이 지지하는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는 신 회장이 사내 성추행 가해자의 중징계를 막고 주력 제품의 원료를 중국산으로 교체하려 하는 등 월권을 행사했다고 주장했다. 신 회장은 “경영 합리화를 위해 대주주로서 정당하게 의견을 전달한 것”이라고 반박했지만 송영숙 회장은 “대주주는 경영에 직접 개입하지 말고 전문경영인이 중심이 돼야 한다”며 박 대표에게 힘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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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된 표 대결
대주주 간 균열이 최대주주와 전문경영인의 갈등으로 비화한 가운데 이달 말 열리는 한미약품 주총에서는 1년 여 만에 다시 표 대결이 재현될 전망이다. 한미약품의 최대주주는 한미약품그룹의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41.42%)이며 신 회장과 한양정밀이 8.67%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신 회장과 한양정밀은 한미사이언스의 대주주(지분 29.83%)이며 송영숙 회장(3.84%)과 임주현 부회장(9.15%), 킬링턴 유한회사(라데팡스 파트너스가 운용, 9.81%)의 지분을 웃돈다. 지분율만으로는 신 회장이 우위를 점할 가능성이 크다.
한미약품 지분 11.25%, 한미사이언스 지분 6.64%를 가진 국민연금이 캐스팅보트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국민연금은 지난 2024년 3월 한미사이언스 주총에서 모녀 측에 힘을 실어주며 형제 측의 이사회 진입을 저지했다.
신 회장과 모녀 측의 600억원 위약벌 소송이 장기전으로 돌입한 가운데 갈등이 극적으로 봉합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신 회장은 지난달까지 “한미약품의 전문경영인 체제와 4자 연합 체제를 유지할 계획”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