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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빈의 수장고 안팎 훑기] 조각 감상자들을 하나로 묶는 35초간의 흥얼거림

중앙일보

2026.03.12 08:12 2026.03.12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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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프스키의 ‘노래하는 사람’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몇 년 전, 국립현대미술관 직원들을 대상으로 가장 좋아하는 소장품을 뽑는 이벤트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작품은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노래하는 사람’이었다. 과천관에서 근무할 때는 야외조각장을 산책하며 이 작품이 흥얼거리는 노래를 듣는 것만큼 기분 좋은 시간도 없다. 계절마다 변하는 자연경관 덕분에 10년 넘도록 봐도 질리지 않는다. 같은 조각이 일본 도쿄의 도심에도 서 있는데, 자연 속에 있는 모습이 훨씬 좋다.

육성 멜로디 흘러나오는 야외 조각
같은 경험 한다는 연대의식 일깨워

11개국에 설치된 ‘망치질하는 사람’
노동해야 사는 인간 숙명 환기시켜

청춘의 불안, 세상의 악에 대한 고민
숫자 강박 시기 거쳐 공공미술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야외조각장에 있는 ‘노래하는 사람’, 1994. [사진 김진현]
주말에는 휴식하는 ‘망치질하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보다 더 유명한 작품은 광화문 흥국 생명 빌딩 앞에 서 있는 ‘망치질하는 사람’이다. 이 조각은 번잡한 고층 빌딩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이 꽤 어울린다. 구부정한 자세로 망치를 천천히 내리치는 동작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평일에는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일하고 주말과 공휴일에는 쉰다.

‘망치질하는 사람’은 1979년에 뉴욕의 한 갤러리에서 ‘노동자’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되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일을 하며 생활을 영위하는 우리 모두를 상징하는 작품”인데, 당시에는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생각하며 구상한 것이라고 한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서류가방을 든 남자’, 1987~88. ‘망치질하는 사람’의 사무직 버전이다. [사진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홈페이지]
노동자의 사무직 버전도 있다. 모자를 쓰고 서류 가방을 든 이 조각은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앞에 서 있다. 그런데 망치질하는 사람만큼 보편적인 공감을 자아내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일단 중절모와 정장에서 성별과 계급, 문화권이 한정되고, 무엇보다 너무 멀끔하다.

반면 ‘망치질하는 사람’은 성별과 시대, 지역을 초월하여 좀 더 노동의 원형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환기시킨다. 비록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일한 적은 없지만 눈앞의 과제에 몰입하는 거북목 자세에는 감정 이입이 된다. 핵심은 앞으로 숙인 머리와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팔. 작가도 말했듯, 인간은 결국 머리를 쓰고 손을 움직이며 각자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노르웨이 릴레스트룀에 있는 ‘망치질하는 사람’, 2010. [사진 보로프스키 홈페이지]
이렇게 보편적인 울림을 주는 덕분에 이 조각은 유난히 인기가 많아서 독일 프랑크푸르트, 미국 시애틀, 스위스 바젤, 노르웨이 릴레스트룀, 일본 나고야 등 전 세계 11군데 설치돼 있다. 그중에서 22m, 55t에 육박하는 서울의 조각이 가장 크다.

보로프스키의 이런 작품들을 보면, 그가 젊어서는 불안 때문에 강박적으로 매일 숫자만 센 적이 있다는 사실, 한때는 세상의 악을 이해해 보고자 히틀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다.

보로프스키는 30대와 40대까지는 꽤나 전위적인 작업을 하면서 뉴욕과 LA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갑작스레 고향인 보스턴 외곽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는 은둔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 공공 조각에만 몰두해 왔다. 그의 모교인 카네기 멜런 대학에서는 그를 인터뷰하면서 “자신의 삶을 단순화하는데 전념하는 복잡한 사람”이라는 말로 이 작가를 묘사했다.

조너선 보로프스키는 1942년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건축을 전공한 화가, 아버지는 피아노와 오르간을 연주하는 음악가였다. 예술적 분위기에서 자라난 보로프스키는 여덟 살 때부터 이웃집 화가에게 그림을 배우고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다. 대학에서는 순수미술 외에도 산업 디자인을 배웠는데, 이때 용접으로 추상 조각을 만드는 데 몰입하기도 했다.

보로프스키가 학교를 마친 60년대 중반의 미국은 사회적 갈등과 반문화가 절정에 달던 격동기였다. 베트남 전쟁으로 사회는 분열되었지만 경제는 호황이었고 예술계는 실험과 혁신이 가득한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선택할지 더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 무렵 그는 자신의 예술적 진로를 두고 엄청나게 방황했다. 작업은 못 하고 앉아서 생각만 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매일 두세 시간씩 앉아서 종이에 숫자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첫날 1에서 1000까지를 쓰면, 다음날엔 1001부터 시작하는 식이었다. 아버지는 대학원까지 보내줬더니 숫자나 세고 있다고 농담을 건넸다.

5년 동안 숫자 적은 종이더미 전시
‘자화상’, 1980.
그는 이렇게 매일 두 세시간씩 숫자만 적는 것으로 예술 활동을 대신했고, 이를 2년 넘게 지속한 후에야 제대로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작품을 그날 센 숫자와 연결하기 시작했다. 작업을 완성한 후 서명 대신 그 날의 마지막 숫자를 적기 시작한 것이다.

 ‘숫자 세기’, 1975, 뉴욕 폴라 쿠퍼 갤러리 전시 장면.
32세에 열린 첫 개인전에는 5년 동안 매일 적어 내려간 숫자, 즉 1에서 234만6502까지가 적힌 종이 더미를 작품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부터는 꿈속에서 본 이미지들을 드로잉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정신분석학에 관심이 많아 무의식의 세계에 몰입했다. 일부러 잠에서 덜 깬 상태로 그린 즉흥적인 드로잉들에 그날의 숫자를 함께 남겼다.

‘망치질하는 사람이 있는 갈라진 머리, 2,669,857’, 1979~90.
꿈과 무의식을 반영한 이 이미지들은 벽화나 조각으로 구현되기도 했다.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드로잉이 특히 흥미로운데, 사람의 머릿속을 좌우로 나눈 후 한쪽에는 ‘망치질하는 사람’의 형상이, 오른쪽에는 ‘2,669,857’이라는 숫자가 그려져 있다. 밝음과 어두움, 의식과 무의식, 노동과 예술의 이분법이 표현된 것일까? 불안이 가득해 보이는 얼굴은 분열증적 상태로 읽히기도 한다.

이 시절 보로프스키의 작품을 보면, 생각이 많고 불안이 가득한 젊은 예술가의 내면이 엿보이는 듯하다. 결국 숫자를 세는 기계적이고 단순한 행위는 그의 예민한 정신세계를 적절히 통제하고 안정시키는 일종의 수행이었던 셈이다.

보로프스키는 베트남전을 경험한 세대로서 전쟁과 폭력에 대해서도 깊이 고뇌했다. 1980년대에는 미국의 수감자들을 인터뷰하는 다큐멘터리를 찍고, 그 이후에는 히틀러의 생애를 연구한 작업도 발표했다. 세상의 비극들을 이해하기 위한 나름의 고민이 투영된 작품들이었다.

보로프스키의 공공조각은 그가 한때 이렇게 머릿속이 복잡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단순해 보인다. 이는 “공공미술은 나 혼자만의 일기장이 아니”라는 확고한 철학 덕분이다. 지나가는 사람 모두가 강제로 관람해야 하는 작품인 만큼, 작가의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원형적인 상징들을 사용하되, 여기에 의미와 깊이를 담으려고 노력한다.

작품은 기도, 작업실은 사원
이런 노력 덕분에 그의 대형조각들은 한눈에 이해할 수 있고, 주변 경관과 무리 없이 어울리는 단순한 형태를 띤다. 바쁜 발걸음을 멈추게 하면서 경탄을 자아내는, 대체로 기분 좋은 작품들이다.

젊은 시절에 불안을 경험하고 세상의 악에 대해 고민하던 젊은이가 나이가 들어 공공조각에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근본적으로 모두 같은 것을 공유하는 존재임을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사람들이 동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로 연결돼 있다는 의식이 강해질수록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아질 것이라고 낙관한다.

베를린 슈프레강에 설치된 ‘분자인간’, 1999.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을 기도에 비유하고 자신의 작업실을 “사원”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제작되어 나가는 작품들이 긍정적인 메시지를 온 세계에 전파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예술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1970년대에 처음 만든 ‘분자 인간’이다. 동일한 분자 구조를 공유하고 있는 인류의 통합을 상징하는 이 작품은 세계 곳곳에 설치돼 있는데, 특히 독일 베를린의 슈프레강에 설치된 버전이 유명하다.

한편 과천의 ‘노래하는 사람’은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불안과 싸운 자신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육성으로 녹음한 35초짜리 멜로디는 신기하게도 머릿속이 복잡한 날에는 귀에 들어오지 않다가 여유가 생기면 기분 좋게 들려온다. 자연스럽게 배경 속에 스며드는 편안한 선율이다.

세상이 좋아지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만드는 작가가 스튜디오 안에서 멜로디를 녹음했을 모습을 떠올리면 왠지 마음이 따뜻해진다. 봄이 시작하는 이 계절에 한 번쯤 과천관을 산책하면서 ‘노래하는 사람’의 허밍을 들어 보기를 추천한다.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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