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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련의 시시각각] 돌아온 무역법 301조 시대, 준비됐나

중앙일보

2026.03.12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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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련 콘텐트3부국장 겸 기업연구부장
마침내 미국 정부가 무역법 301조 카드를 꺼냈다. 미국의 무역을 제한하는 외국 정부의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행위나 정책, 관행이 확인되면 보복 관세 등 조치를 취하겠다는 엄포다. 미 무역대표부(USTR)가 한국·일본·유럽연합(EU) 등 동맹국 다수까지 조사 대상에 올린 데엔 노림수가 있다.

USTR이 향후 디지털 서비스 거래 분야도 들여다보겠다는 문구에 답이 있다. 미국 빅테크 플랫폼 기업에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규제를 문제삼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의 온라인 플랫폼법이나 망 사용료 부과, EU의 디지털서비스법을 비관세 장벽으로 꼽아 왔다.

미 정부와 손잡은 빅테크 기업들
기업 이익 위해 통상 갈등 점화
‘경제안보’ 위해 데이터 주권 지켜야

‘미국의 이익’을 주장하는 트럼프 정권은 첨단 기술 기업들과 그 어느 때보다 끈끈하게 동조화돼 있다. 엔비디아는 특정 칩의 중국 매출 일부를 미 정부에 수수료로 내기로 했고, 인텔도 미국 정부를 주주로 받아들였다. 7500만 달러(약 1100억원)를 들여 영부인 멜라니아에 관한 다큐 영화를 제작한 아마존처럼 국익이 아니라 트럼프 일가의 사익에 충성하는 기업도 종종 있다.

대신 미국 정부는 이들 기업이 AI 기술 개발에 필요한 데이터를 확보하거나 상업 활동을 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앞장서서 치워 준다. 지난달 미 국무부는 세계 각지의 대사들에게 ‘각국의 데이터 주권, 데이터 현지화 규제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로이터 보도). 유럽의 디지털서비스법을 두고는 표현의 자유를 해친다고 성토한다. 하지만 미국 기업의 생성AI 서비스가 아동 성 착취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문제는 철저히 외면한다. 미국은 ‘문화 전쟁’으로 포장하려 하지만 실상은 미국 빅테크 이익 지키기다.

쿠팡도 이들처럼 ‘미국 정부가 보호해야 할 미국 기업’으로 인정받으려고 애써 왔다. 트럼프 대통령이나 미 의회에 내는 기부금, 트럼프 인맥 확보를 넘어 최근의 행보는 더 과감하다. 쿠팡의 관리 부실로 일어난 고객정보 유출 사건인데, 쿠팡은 이를 한·미 간 통상 문제로 교묘하게 비화시켰다. 한국 국회에선 부실하게 답하던 쿠팡의 미국인 대표는 미 하원에 자진 출석해 입장을 호소하고, 쿠팡 본사의 투자사들은 USTR에 무역법 301조 카드를 한국에 써달라고 청원했다. 하지만 이들은 쿠팡 물류 노동자들의 사망 사고나, 한국의 직전 정권이 전에 없던 조항까지 만들어 쿠팡 창업자를 공정거래법상 총수 지정 규제에서 제외해 준 특별대우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문제는 앞으로 쿠팡 같은 사례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주형(국제통상법) 서울시립대 로스쿨 교수는 “트럼프 정부가 디지털 규제 같은 ‘비관세 장벽’을 문제삼는다는 걸 이용해 이익을 취하려는 미국 기술 기업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진단한다. 특히 AI 산업의 경쟁 규칙을 미국 기업들이 주도하기 위해 한국의 데이터 주권을 압박하는 일이 반복될 수 있다. 우리는 이 압력을 견뎌낼 수 있을까. 최근 한국 정부는 미국과의 관세 협상을 고려해 19년간 미뤘던 구글의 정밀지도 해외 반출 요청을 허가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쪽에선 AI 산업에서 부가가치가 큰 민간 데이터들이 해외 기업으로 줄줄 새고 있다. 산업계에 따르면, 철강·조선 등 한국의 핵심 제조업 현장에 AI나 로봇을 투입해 훈련시키는 미국 기업들이 제법 많다. 제조업이 무너진 미국에선 데이터를 구할 수 없기에 한국 기업들과 손잡고 싶어 한다.

생산성 향상이 급한 우리 기업들로선 합리적 선택이겠으나 한국의 경제안보 측면에선 고민스러운 지점이다. 한국이 축적한 제조업 암묵지(경험과 학습으로 몸에 쌓인 지식)로 미국 AI 로봇의 두뇌와 근육을 훈련시키는 꼴이 될까봐서다. 이제는 쿠팡을 때려잡겠다고 국회·정부가 너도나도 몽둥이를 들었다가 미국 측 한마디에 화들짝 놀라는 수준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정교한 전략으로 새로운 무역전쟁에 대비할 때다.





박수련([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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