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연합뉴스) 김지연 특파원 = 영국 정치 뉴스에서는 사극에서나 들을 법한 '백작', '남작', '경'(Lord)과 같은 호칭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의정 활동을 하고 있는 현직 상원의원들이 이런 작위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 상원 의장의 본명은 마이클 포사이스지만 공식적으로 불리는 명칭은 '드럼린의 포사이스 경'이다. 포사이스 의장은 14년간 하원의원을 지내면서 내각에서 장차관도 역임했다가 1999년 남작 작위를 받아 '종신귀족'으로서 상원의원이 됐다.
현재 842명인 상원의원 대다수가 이같은 종신귀족이다. 종신귀족은 총리가 주요 정당과 독립 위원회의 조언을 받아 추천하면 국왕이 임명한다. 총리나 내각 요직을 거친 정치인, 각 분야에서 높은 전문성이나 사회 공헌을 인정받은 이들이 대상이 된다. 조상 대대로 작위를 물려받은 귀족이 아니라 '자수성가형' 귀족인 셈이다.
'종신귀족'과 대비되는 '세습귀족'도 상원에 약 90명 있다. 2016∼2024년 원내 부총무를 지낸 제9대 코타운 백작 패트릭 스톱퍼드 상원의원은 부친인 제8대 코타운 백작으로부터 이 자리를 물려받았다.
입법의 최종 권한은 실질적으로 하원에 있지만, 상원도 여전히 법안을 심사하고 정부에 질의하며 공공정책을 조사하는 등 의회로서 중대한 기능과 역할을 다하는 곳이다. 일부라 하더라도 중세∼근대에서나 볼 법한 세습귀족이 21세기에 의석을 100석 가까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아무리 군주제가 남아 있는 영국이라고 해도, 현대인의 눈에 이같은 상원의원 세습은 시대에 맞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상원은 20세기 들어 조금씩 변화했다. 1958년 종신귀족직이 도입됐고, 1963년 여성 세습귀족의 상원의원직이 허용됐다.
급진적인 변화는 역시 왕당파에 뿌리를 둔 보수당보다는 노동당 정부에서 일어났다. 토니 블레어 총리는 세습귀족이 상원 의석을 자동으로 차지하게 되는 건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하며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고 1999년 660여 명의 세습귀족이 단숨에 상원에서 쫓겨났다.
이때 남겨둔 세습귀족 의석 92석도 이제 곧 사라지게 됐다. 2024년 7월 총선에서 14년 만의 정권교체에 성공한 키어 스타머 총리의 노동당 정부는 세습귀족 완전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지난 10일(현지시간) 남은 세습귀족 상원의원 92명의 권한을 폐지하는 법안이 상원 마지막 관문을 통과했다.
스타머 정부는 1999년 못다 한 상원 개혁을 마무리한다는 방침으로, 현재 대부분 종신직인 상원의원에 은퇴 연령을 도입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
이번 회기가 끝나는 5월에 상원 세습귀족 의석은 공식적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국왕의 자문 기구로서 의회의 기원이 시작된 11세기부터 따지면 1천년, 13세기 의회 역사가 시작된 때부터 따지면 800년, 상하원 양원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한 14세기부터 따지면 700년 만이다.
결코 빠르다고 볼 수 없는 이같은 변화에도 진통은 뒤따랐다. 여전히 정부의 국정운영 방향을 국왕 연설(킹스 스피치)로 발표하고 정부 공식 명칭이 '폐하의 정부'(His Majesty's Government)인 나라답게 전통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세습귀족 92석을 남겨둔 건 1999년 상원법 통과 당시 격렬한 반발을 가라앉히기 위한 일종의 타협안이었다. 완전 폐지는 번번이 무산돼 결국 27년이 걸렸다. 이번 법안에도 제1야당 보수당은 반대하다가 일부 세습귀족을 종신귀족으로 상원에 남기는 등의 조건으로 반대를 철회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10일 밤 상원에서 세습귀족 의원들의 발언에는 씁쓸함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19대 데번 백작인 찰스 코트니 상원의원은 "우리(세습귀족) 중에는 900년 가까이 공직에 봉사해온 가문도 있다"며 "이번 법안 통과는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근로자 권리를 증진하고 노동자 안전을 향상하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노동당) 정부가 오랫동안 봉사해온 헌법 인력에 고작 7주라는 법정 최소기간보다 훨씬 짧은 예고 기간을 두기로 한 건 아이러니하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도 코트니 의원은 "나는 이곳을 사랑한다"며 "세습된 특권의 흔적이 아닌 실력으로만 이곳에 돌아오고 싶다"고 강조했다.
제2대 스트래스클라이드 남작 토머스 갤브레이스 상원의원은 "오늘 거의 800년 가까이 상원에 봉직해온 세습귀족들의 시간이 마침표를 찍는다"며 "그들은 출생이라는 순전한 우연으로 이곳에 왔고 의무를 다하기를 택했지만 그에 대한 감사는 거의 들리지 않아 유감"이라고 말했다.
그는 "1999년 블레어의 '숙청' 당시 나는 그 법안을 역사 앞의 흉터라고 불렀다"며 "그 흉터는 낫지 않았고 오늘 법안의 결과로 영원히 낫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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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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