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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앞 줄서는 정치, 단종의 퇴위가 그 시작이었다

중앙일보

2026.03.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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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장이 본 ‘군주 단종’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장이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 역사문화관에서 최근 화제를 모으는 단종의 삶과 리더십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정훈 기자
“사무사(思無邪)는 무슨 뜻인가.”

1452년. 소년 왕 단종이 경연에서 신하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박팽년이 답했다. “생각에 사사로움이 없고 마음이 바르면 모든 일이 바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단종의 물음은 단순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정치는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 권력은 무엇으로 정당화되는지 되묻기 위함이었다. 단종은 어린 왕이었지만 정치의 근본을 고민하고 있었던 거였다.

최근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왕으로 꼽히는 단종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영화 속 단종은 권력 다툼 속에서 희생되는 나약한 왕으로 그려진다. 이에 대해 세종과 정조 등 왕과 재상의 리더십을 중심으로 조선 전기 역사를 연구해온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장은 “단종은 역사 속 희생자로만 치부하기엔 아까운 존재”라며 “세종과 문종이 설계한 이상적 유교 정치 체계를 이어가려 했던 능동적 군주인 동시에 정치와 인재, 국가 운영 등에 대해 분명한 생각을 가진 될성부른 재목이었다”고 평가했다.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릉에서 박 원장을 만나 실제 역사 속 단종을 톺아봤다.

황보인, 자기 아들 1년에 5단계나 승진시켜

Q : 역사학자 관점에서 영화를 어떻게 봤나.
A : “사극이나 역사 영화는 흔히 ‘1%의 사실과 99%의 상상력’이라고 말한다. 실제 역사적 사실은 단종이 왕이 됐고,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폐위된 뒤 복위 시도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사육신 사건이 발생했다는 정도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역사가 현시대에 던지는 질문이다. 그런 점에서 ‘왕사남’은 세부 사건에선 허구가 많지만 조선 정치가 안고 있던 권력 갈등 구조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Q : 실제 기록 속 단종은 어떤 왕이었나.
A : “단종이 비극적인 소년 왕만은 아니었다. 실록을 보면 정치 감각이 엿보이는 장면이 많다. 1452년 12세 나이로 즉위했을 때 단종의 첫 발언은 ‘여러 대신에게 의논하라’였다. 대개 왕의 첫 발언은 ‘즉위 제일성’이라고 해서 그 시대를 아우르는 국가 경영의 본질로 해석되는 점에 비춰볼 때 세종 시대 ‘협력 통치’를 거듭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방에 내려가는 수령을 직접 만나 선정을 당부하는 모습 역시 할아버지 세종을 닮았다. 경연에 부지런히 나가 궁금한 점을 진지하게 물어보고 수양대군에게 ‘함께 어려움을 풀어나가자’고 당부하며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Q : 단종의 정치력이 드러난 부분이 있다면.
A : “실록을 보면 인재 등용에도 분명한 기준을 마련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약회 임명 논쟁이다. 어린 왕과의 힘겨루기에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인사 발령을 취소하라는 언관들에게 단종은 선왕의 말을 인용하며 반박했다. ‘문종께서 근시직을 맡기지 말라고 했을 뿐이지 수령까지 맡기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다. 또 김약회 같은 무재(武才)가 몇이나 되겠는가’라면서다. 능력 중심 인사 원칙을 강조한 셈이다. 감찰 이윤 파면을 두고 대신들 간에 논쟁이 일어났을 땐 ‘재주가 없으면 맡기지 않는다. 능력 중심으로 인재를 써야지 누가 추천했다고 임명하는 건 안 된다’고 못 박기도 했다. 그가 17세에 왕위에서 물러나지 않고 세종처럼 30년 가까이 통치했다면 우리 역사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한 장면. 누적 관객 1200만 명을 넘어섰다. [사진 쇼박스]
박 원장은 “문제는 왕을 보필하는 신하들에게 있었다”며 “인사권을 쥔 재상들은 합격자 수를 늘리면서까지 아들·사위를 합격시키는가 하면 황보인은 아들을 1년에 5단계나 승진시키고 김종서는 자격 미달 아들을 천거하는 등 낯 뜨거운 일도 서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세종이 중시했던 인사 상피(相避) 원칙도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원칙론자인 허후조차 “내 힘으론 사사로운 인사 관행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며 무기력을 호소할 정도였다. 이는 계유정난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박 원장은 “가족에게 행해지던 인사 특혜가 공신이란 이름 아래 지지 세력으로 옮겨갔을 뿐 그 어디에도 세종이 중시한 인재 기준에 적합한 인사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Q : 숙부 금성대군의 ‘역모’가 성공했다면 단종도 복위할 수 있었을까.
A : “단종이 다시 왕이 되고 금성대군이 보필하는 이상적인 구조가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금성대군도 권력을 장악한 뒤엔 ‘제2의 수양대군’이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도 어린 왕과 강력한 숙부 중심의 구조에선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았나. 역사가 늘 이상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거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Q : 영화에선 단종에 대한 연민의 시선이 우세한데.
A : “수양대군의 가장 큰 과오는 중요한 인재를 죽인 것과 시대정신을 왜곡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삼문·박팽년·신숙주도 계유정난의 정당성엔 동의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직접 왕이 돼선 안 됐다. 유교적 왕정의 이상향은 군주가 비록 부족하더라도 훌륭한 군자를 두고 나라를 이끌어가는 거다. 단종은 물론 충신들도 수양대군에게 주공(周公)의 역할을 기대했지만 그의 과욕으로 이 모든 게 좌절된 게 조정은 물론 백성들도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당시 시대정신을 거슬렀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순 없지만 이와 별개로 세조의 업적은 뛰어났다는 게 박 원장의 평가다. 그는 “여진족 정벌에 나서는 등 국방 문제 해결에 특히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며 “세종 때부터 이어진 경국대전 체제를 완성한 것도 세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런 면에서 세조는 리더십 딜레마의 전형”이라며 “성과는 좋지만 일하는 방식은 못마땅한 상사였다”고 해석했다.


Q : 단종 사건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A : “단종의 퇴위는 단순한 왕위 교체가 아니라, 세종과 유교 지식인들이 설계한 이상적 유교 왕정 시스템의 붕괴였다. 이후 조선 정치는 완전히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종 때는 정책 토론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등 학문 중심의 정치가 강했다. 하지만 권력 충돌 이후에는 정치적 생존이 제1의 목표가 됐다. 국정을 올바르게 이끄는 능력보다 누구 편에 서느냐가 중요해진 거다. 이런 ‘권력 줄서기’ 정치 문화는 이후 조선을 넘어 우리 역사에서도 꾸준히 반복됐다.”

민생·국방·국격 갖추는 게 리더의 책무

Q : 단종이 쫓겨나지 않고 계속 왕위를 이어갔다면 어땠을까.
A : “분명한 건 세종의 시스템 경영이 지속됐을 거다. 의정부서사제 중심의 군신 협업 체제가 유지되고 집현전과 경연도 지속했을 거다. 김종서·황보인 등 세종 시대 핵심 인재들도 북방 개척과 국방·학문·행정 등 각 분야에서 크게 활약하지 않았을까. 단종이 추구했던 소통의 리더십 속에서 인재들의 역량도 극대화됐을 거다. 그랬다면 이후 발생한 중종반정과 인조반정, 그리고 12·12 사태까지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쿠데타’ 식의 ‘삿된 정치’가 횡행하진 않았을 거라고 본다.”


Q : 시대에 따라 필요한 리더십도 바뀌는데, 오늘날 꼭 필요한 리더십은 뭘까.
A : “조선 전기, 즉 태종에서 문종에 이르는 약 50년이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최전성기였다. 정치·과학·국방·행정·문화가 함께 발전한 시기였다. 세종은 ‘사람은 누구나 하나씩 잘하는 게 있다’는 ‘인유일능’을 강조하며 필요한 곳에 알맞은 인재를 쓰는 ‘적소적재’ 원칙을 구현했다. 국방의 김종서, 음악의 박연, 과학의 장영실처럼 각 분야 인재들이 최대로 활약하도록 시스템을 설계했다. 태종이 칼과 창으로 국가를 강건하게 했다면 세종 자신은 말 등에서 내려와 문(文)으로 백성을 살리고 국격을 갖추는 게 ‘수성 군주’로서의 책무라고 봤다. 전 세계에 K컬처와 K국방 등 국격이 올라가는 시점에서 우리 위정자들도 곱씹어볼 대목이다.”

박 원장은 “세종의 능인 ‘영릉’에서 영(英)은 ”꽃이 가장 만개한 시기“를 뜻한다”며 “이 시기에 과학기술, 한글 창제, 영토 확장 등 다양한 분야가 만개했지만 가장 중요한 성과는 인재들의 꿈과 능력이 꽃피운 시대라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나라가 제일 못하는 게 인재 활용”이라며 “정치적 계산이 아닌, 적소에 맞는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가장 필요한 가치”라고 덧붙였다.

‘왕사남’이 재조명한 단종 이야기는 단순한 궁중 비극이 아니다. 정치는 무엇으로 정당화되는가. 권력은 어떤 마음으로 사용돼야 하는가. 어린 왕이 즉위 후 처음으로 꺼낸 “생각에 사사로움이 없어야 한다”는 원칙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3년 2개월. 단종의 짧은 통치가 남긴 여운은 결코 짧지 않다.





허정연([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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