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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수상·의원·의사 다 거기 있었다, 말라야대학의 기억 [왕겅우 회고록-청년기(4)]

중앙일보

2026.03.1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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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나의 새 정체성




민족이란 무엇인가?


말라야대학의 처음 몇 달 동안 민족 건설을 바라보는 하나의 길로 문학을 생각하게 되었다. 장래의 말라야가 공산당(CCP)에게 밀려나고 있는 국민당 중국이나 합법적인 공산당(PKI)이 만주적 선거에 참여하는 인도네시아와 전혀 다를 것은 분명했다. 이제 좁은 국경 안으로 돌아갈 대영제국과도 다를 것이었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의 젊은 작가들을 마닐라에서 만나며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각자의 역사를 가진 수많은 섬으로 이뤄진 두 나라는 새로운 종류의 식민-이후 국가를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페락 주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좀 있었다. 이포와 가까운 킨타 계곡을 전쟁 상태에 묶어놓고 있는 비상사태에 관해 읽은 것도 있었다. 중국인의 관점을 의식적으로 벗어나 내가 속하게 될 말라야의 모습을 그려보려고 노력했다. 예상보다 힘든 일이었다. 대개의 책에는 영국 식민지와 두 종류 말레이국가들을 합친 것으로 말라야가 설명되어 있었다. 두 종류 중 하나는 “보호”를 받는 네 나라고, 또 하나는 “자문”을 받는 다섯 나라였다.

내가 이해한 내용으로 기억하는 것은 많지 않다. 비-말레이인 인구 비율이 반도 지역에서는 40퍼센트, 싱가포르에서는 80퍼센트기 넘는다. 싱가포르가 말라야에 들어간다면 말레이인 인구가 절반이 안 된다. 전쟁 후의 말라야에서 싱가포르가 빠져야 했던 이유다.

말레이인 지도자들은 연방이 말레이 국가가 되고 아시아 다른 곳에서 와 정착한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허용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들이 제일 두려워한 것은 중국인이 주도하고 중국 혁명에 영향받는 말레이공산당이었다. 영국인들 역시 냉전에서 공산주의가 이기게 놔두지 않을 결심이 확고했다. 중국계와 인도계 주민들은 정치적 통합을 바라보는 영국의 계획이 내키지 않았으나 영국-말레이 합의의 진행을 막을 길이 없었다.

말라야라는 이름의 국가는 존재한 적이 없었고, 각 주(국가) 사람들은 말레이인이든 비-말레이인이든 다른 주 사정을 잘 몰랐다. 내가 자란 페락 주에서 말레이인은 술탄의 신민이고 중국인과 인도인은 장사를 하거나 일하러 오는 사람들이었다. 해협식민지에 정착한 말레이인들은 말레이 군주들에게 에속되지 않았다. 인도와 아랍세계에서 온 무슬림 조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그쪽에 소속감을 가지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라야”, 대(大)인도네시아의 일부로 새로운 정체성을 상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새 국가의 시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그 의미를 확실히 알지 못했다. 대학에 들어간 후 비로소 말라야가 어떤 길로 갈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싱가포르에서 보고 들은 것을 통해 새 국가의 건설이 매우 복잡한 작업이 될 것을 알게 되었다. 싱가포르도 언젠가 말라야의 일부가 될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했는데, 희망적인 생각이었다. 반도 쪽의 우리는 싱가포르 형편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흥정이 시작될 것이고 그때까지는 연방의 11개 주가 새 민족국가의 성격을 결정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이 국가의 당면 과제, 특히 경제 발전을 공부하고 싶었다. 말라야는 전략상품인 고무의 세계 최대 생산지였고 주석 산업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두 분야의 수익성이 너무 높아서, 영국이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며 그 독립을 늦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뒤얽힌 민족 문제와 계층 문제

정치에 관해서는 지역 중국인사회의 요구가 어떤 것인지 나는 깜깜했다. 부모님은 장수성 출신인데 말라야의 중국인 대부분은 광둥성과 푸젠성 출신이었다. 교육자인 아버지는 현지 정치나 중국 정치에 관계되는 지연, 혈연, 사업관계와 무관했다. 어머니는 관심이 있어도 중국 사정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공동체 외곽에 머물러 있었다.

지역 중국인 중에는 중국을 바라보며 돌아갈 날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말라야를 자기 집으로 여기고, 말레이인이 특별한 지위를 누리게 될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인도인과 함께 평등한 지위를 바라며 2등 국민의 위치를 거부했다. 중국인의 최대 관심사는 자기네 언어와 문화의 장래, 특히 중국인 교육의 장래였고, 이 문제에 관해서는 아버지도 확고한 주견을 갖고 계셨다. 1954년까지 중국인학교에 대한 정부의 정책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되자 조기퇴직을 결정하셨다.

계층 문제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공장과 농장 일꾼은 대개 중국인과 인도인이었고 시골 농민은 말레이인이었다. 두 집단은 스스로를 하나의 노동계급으로 보지 못했다. 노동조합 운동이 있었는데, 정부는 공산주의의 침투를 걱정했다. 중국공산당 남양분지회(南洋分支會)가 설립된 일도 있었다. 그를 이어받은 말라야공산당은 영국 식민주의로부터 독립을 제창했으나 일본에 대항하는 데는 영국 편에 섰다.

일본 패전 후 영국인은 말라야인민항일군(MPAJA)을 무장해제했다. 그러나 영국군과 함께 싸운 항일군 장병들은 말라야의 장래에 대해 자기네에게도 발언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노동조합운동에 열심히 참여했다. 중국, 인도, 실론,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의 공산주의 운동이 말라야에 영향을 끼칠 것을 걱정하던 영국 당국에게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이에 더해 말레이인과 중국인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공산주의자 대부분은 중국인이고 말레이인과 인도인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식민당국과 말레이 군주들을 지키는 군대는 말레이인으로 구성되었다. 말라야공산당이 해산되고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싱가포르를 비롯한 도시의 공산주의자들은 지하로 숨거나 정글로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대학 입학 당시 내가 알고 있던 내용이 이런 정도였다. 말라야를 민족국가로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이해하는 데 필요한 도움은 대학에 없었다. “말라야”는 영국인이 우리에게 남겨주려 하는 국가의 이름으로 엄밀성 없이 쓰는 말이었다. 이제부터 많은 것이 우리 지도자들의 어깨에 걸려 있었다.

내가 이포에 돌아갈 무렵에는 몇몇 이름이 떠오르고 있었다. 말레이인으로 가장 저명한 인물은 통일말레이민족기구(UMNO) 초대 의장 다토 온 빈 자파르였다. 중국인 중에는 아직 뚜렷한 지도자가 없었는데, 영국식 교육을 받은 중국인으로 가장 활발했던 인물은 말라야중국인협회(MCA) 회장 탄쳉록(陳禎祿)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 그를 지도자로 받들 생각이 없었던 사실은 이포에서 암살 시도가 말해준다.



말라야의 일부이면서 말라야와 달랐던 싱가포르

1949년은 내게 전환의 해였다. 그 후 20년간 말라야, 그리고 그를 이은 말레이시아가 내 모든 활동을 뒤덮었다. 연방과 대학이 있었고, 말라야의 여러 지방에 관해 배우면서 떠오른 말라야 문학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휩쓸려버렸다. 몇 달 지난 후 깨닫게 된 것은 싱가포르에 관해 실제로 아는 것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도시가 새 말라야의 일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멋진 그림 한 구석의 커다란 얼룩 같았다.

물론 이유에 대한 설명은 있었다. 이 식민지는 영령 말라야의 실질적 중심지였는데도 말라야연맹에서도 빠졌고, 뒤이어 말라야연방에서도 빠졌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만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확인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싱가포르는 말라야의 핵심적인 일부이고 말라야가 진정한 독립을 성취할 때는 싱가포르도 함께할 것이라고 했다.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이제 싱가포르를 알러 나설 때가 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북쪽에서 이곳으로 공부하러 온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 그들은 식민지 신민의 위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유감스럽게도 이런 질문을 추구하는 데 학교 위치가 적합지 않았다. 아름다운 식물원과 널찍한 저택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풍경이 별로 없었다.

어차피 1학년 동안 밖에 다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나가면 외식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는 것이 한 가지 이유였다. 또 다른 이유는 학교 안에서 강의 듣고 이런저런 회의 참석하는 것 외에도 할 일이 너무 많은 것이었다. 새 친구들에게 배우고 싶은 것이 많던 나는 많은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 도시가 동방 대영제국의 주축이 된 사정을 아는 데 두 권의 책이 도움이 되었다. 메이크피스, 브루크와 브래덜의 〈싱가포르의 백년〉과 송옹샹의 〈싱가포르 중국인의 1백년 역사〉였다. 싱가포르가 반도의 주들과 어떻게 다른 곳인지 조금 알 듯하게 되었다. 매일 신문에서 읽는 상황의 역사적 배경도 알게 되었고, 싱가포르 지도자들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주장을 하는지도 곧 알게 되었다. 주로 중국인과 인도인이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싱가포르 2백주년 기념행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내 학생 시절에 스탬포드 래플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말하면 지금 사람들은 놀랄 것이다. 학교에 래플스협회가 있었고 그 이름을 붙인 장소와 기관들이 있었으나 하나의 이름일 뿐이었다.

장학생으로 같은 기숙사에서 지낸 싱가포르 친구들에게 차이나타운, 동해안의 해수욕장, 먹기 좋은 식당과 피해 다닐 구역 등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들은 강의가 끝나면 집에 갈 때가 많았고 주말을 학교에서 지내는 일이 별로 없어서 배우고 싶은 만큼 배울 수가 없었다. 그밖에는 문학 등 과외활동을 열심히 하는 상급생들이 있었으나 학교에서 살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 나눌 기회가 적었다.



복합사회의 전망을 어둡게 만든 마리아 헤르토그 사태

그해에 내가 배운 어느 것도 1950년 12월의 폭동 사태를 위한 마음의 준비가 되지 못했 다. 마리아 헤르토그 사태는 내가 어렴풋이 포착하고 있던 이 식민지의 복잡한 유산을 여러 겹 층위에 비쳐 보여주었다. 후에 탈식민주의와 다국적주의의 구성 요소로 나타날 인종과 종교, 법과 정의에 관한 다양한 생각들, 그리고 미디어의 역할이 갑자기 맨얼굴을 드러냈다.

마리아 헤르토그의 네덜란드인 아버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에서 일하고 있다가 1942년 일본 점령 때 포로수용소에 들어갔다. 유라시아 혼혈의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살다가 자신이 수용소에 들어갈 때 마리아를 한 말레이인 여인에게 맡겼다. 그 여인은 마리아를 딸로 입양하고 자기 고향 (말라야의) 트렝가누에 데리고 가서 살았다.

전쟁이 끝난 후 마리아의 아버지가 딸을 찾아 나섰다. 마리아가 싱가포르에 와 있었기 때문에 이곳 법원에서 재판이 열렸다. 영국인 판사는 마리아가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말레이 양모가 항소에서 이겨 풀려난 어린 마리아를 말레이 총각과 결혼시켰다. 네덜란드인 아버지가 재항소를 통해 결국 마리아의 양육권을 확보했다.

무슬림사회가 격분했고, 판결이 나오던 날 많은 군중이 법원에 모였다. 판결이 나오자 폭동이 시작되었다. 3일간의 소요 중 18명이 목숨을 잃고 170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성난 군중은 유럽인만 보이면 두들겨팼다. 감정의 엄청난 격앙에 우리 모두 놀랐다.

싱가포르가 질서 속에 자치와 탈식민을 위해 준비해 나가는 모습을 그린 내 그림은 하룻밤 사이에 흐려져 버렸다. 이런 것이 “복합사회”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일까? 폭동 사태 덕분에 싱가포르 사회에 대한 순진한 생각을 벗어났다. 제국에서 국민국가로의 전환이 얼마나 힘든 과정이 될지 실감하게 해준 일이었다. 무감각한 결정이 얼마나 쉽게 도시를 불태워 버릴 수 있는지 우리 모두 알게 되었다. 싱가포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민족주의의 종족적 원리에 끊임없는 반성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져준 일이었다.

밀림의 전쟁은 브리그스 계획으로 나아갔다. 시골의 중국인을 모아 수용소 비슷한 “새마을”에 살게 하는 이 계획의 목적은 50만 중국인으로부터 말라야공산당이 병력을 충원하고 식량, 의약품 등 물자를 보급받는 길을 차단하는 데 있었다.

그해 말 말라야공산당이 아직 강력한 세력이라는 사실을 말라야연방 고등판무관 암살이라는 극적인 소식이 확인해주었다. 몇 해 후 공산당 지도자 친펭은 이 암살이 우연한 사건이라고 진술했다. 누구든 공격하려고 매복했는데 공격한 차에 그런 거물이 타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영국 측이 고삐를 놓쳐버린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지역을 휩쓸었다.

나는 1학년 때 학생회 임원으로 뽑혔기 때문에 상급생들과 많이 어울려 지냈다. 나이 든 의과생 중에 인품이 원숙하고 공공 의식이 뛰어난 사람이 몇 있었다. 마하티르 모하메드, 탄치쿤, 림키진과 마지드 “코코” 이스마일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마하티르는 우리 학생회 일을 솔직히 좀 우습게 보며 우리가 “정치 소꿉놀이”를 한다고 놀렸다. 진짜 정치는 학교 밖, 인민 속에 있는 것이라며. 그가 벌써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고, 장래 수상이 되리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사심 없는 태도가 어떤 것인지 보여준 탄치쿤은 후에 말레이시아의 인기있는 야당 의원이 되었다. 림키진과 “코코” 마지드는 고향인 조호르 주와 셀랑고르 주의 의사가 되었다. 모두들 싱가포르가 독립 말라야의 핵심적 부분이고 곧 연방에 들어올 것으로 생각했다. 새 국가에 큰 믿음을 가지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내게 처음으로 가르쳐준 사람들이기도 하다.




김기협([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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