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면 다음 주 15조원 안팎의 추가경정예산(추경)안이 나올 전망이다. 준비 기간을 절반 이상 단축한 초고속 편성이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촉발된 국제유가 급등이 물가·환율을 동시에 자극하자 경기 대응용 재정을 신속히 투입하겠다는 포석이다.
정부가 본격적인 추경안 마련에 착수한 것으로 15일 확인됐다. 추경 편성을 담당하는 기획예산처 실무진은 주말을 반납하고 기초 작업에 착수했고, 각 부처도 세부 예산 조율에 들어갔다. 청와대도 속도전에 뛰어들었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이날 오후 추경 관련 관계부처 차관회의를 소집했다. 이번 추경의 트리거가 된 중동 사태의 장기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국가재정법상 추경 사유(대내외 여건의 중대한 변화)를 충족한다는 판단이다.
발표 시점은 빠르면 다음 주가 될 전망이다. 정부가 추경안을 마련할 때는 부처별 예산을 취합하고, 조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돈 쓸 곳을 정밀하게 확정하는 작업이다. 통상 한 달 이상 시간이 걸리지만, 이재명 대통령이 ‘신속한 편성’을 강조한 만큼 최대한 앞당기겠다는 것이다.
추경의 핵심은 에너지 가격 급등에 따른 서민·실물 경제 지원이다. 구체적으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등 취약계층과 농어민∙소상공인 등에게 에너지 바우처를 지급하는 방안이 유력하다. 13일부터 석유 최고가격제를 시행한 만큼 이에 대응하는 재원도 필요하다. 최고가격제는 정유사가 주유소에 공급하는 가장 높은 가격을 정하고, 정부가 그 손실을 보전하는 구조다. 시행 기간이 길어지면 손실 보전 규모 또한 커질 수 있다.
2008년 한 차례 시행했던 유가환급금도 거론된다. 2007년 1월 60달러 수준이던 국제유가가 2008년 5월 140달러까지 가파르게 치솟자 이명박 정부가 썼던 카드다. 당시엔 총급여 3600만원 이하 근로자 980만명과 자영업자, 일용직 근로자 등 1650만명에게 6만~24만원의 유가환급금을 지급했다. 다만 유가환급금은 재정 지출이 아니라 소득세를 환급해주는 형태라 이번 추경 논의와 병행하기 어렵고, 준비 작업에 시간이 걸려 현 상황과 맞지 않는다는 분석도 있다.
급등한 유가가 장바구니 물가와 내수 위축으로 번지는 걸 막기 위해 지역 화폐를 지급하는 방안도 검토될 전망이다. 앞서 이 대통령은 “직접 지원을 하는 것이 좋고, 현금보다는 지역 화폐 형태로 지급하면 지역 상권 매출로 전환되며 이중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수출 기업 지원책과 함께 중동 사태 전부터 추경 필요성이 제기된 문화·예술 관련 사업도 일부 포함될 전망이다.
전체 규모는 15조원 안팎으로 거론된다. 이미 정부가 국채 발행 없는 추경을 공식화한 만큼 재원은 초과 세수를 주축으로 마련할 전망이다. 일단 법인세는 지난해 삼성전자 등 반도체 기업 중심으로 영업이익이 큰 폭으로 늘면서 당초 전망치(86조5000억원)를 상회할 전망이다. 증권가에선 법인세 초과 세수 규모만 9조~25조원으로 예상한다. 주식시장 활황에 따라 증권거래세 또한 4조~5조원가량 더 들어올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은행 잉여금도 숨은 카드다. 한은은 매년 당기순이익의 30%를 법정적립금으로 쌓고, 여기에 임의적립금을 제외한 나머지를 정부에 납입한다. 한은의 2025년 당기순이익은 2024년(7조8189억원)의 약 두 배 수준인 15조원대에 이를 전망이다. 외화자산 운용 수익과 함께 지난해 하반기 원∙달러 환율이 출렁이는 과정에서 거둔 환차익이 반영됐다. 추경 규모가 예상보다 커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 12일 경제동향에서 ‘유가 상승이 경기 하방 위험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정부가 빠르게 추경 카드를 꺼낸 건 중동 사태의 경로를 예상하기 힘든 상황에서 모처럼 나타난 경기 회복 불씨를 꺼뜨리지 않겠다는 의지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추경 편성에 착수한 것만으로도 내수 심리가 악화하는 것을 막는 시그널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투자은행(IB) 씨티는 15조원 규모의 추경이 집행될 경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최대 0.21%포인트 끌어올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이번 성공적인 선제 대응이 될지, 일시적인 진통제에 그칠지는 향후 추경 집행 과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은은 “세부 사업의 분야와 규모, 집행 시기 등에 따라 (추경 효과는) 크게 달라진다”고 언급했다.
일부에선 신중론도 나온다. 모든 여력을 한 번에 소진해선 안 된다는 취지다. 정규철 KDI 경제전망실장은 “불확실성이 큰 만큼 지금 당장 급한, 필요한 정도로 하고 상황을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며 “유가 상승으로 타격이 큰 취약계층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