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싱가포르 센토사 골프클럽 세라퐁 코스 18번 홀. 관중석에서 천둥 같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태훈의 약 80㎝ 파 퍼트가 홀을 맞고 나왔기 때문이다. 우승한 브라이슨 디섐보도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을 정도다. 우승상금 400만 달러(약 60억원)와 2위 상금 225만 달러(약 33억7500만원)의 차이, 26억2500만원이 그 80㎝ 안에 들어 있었다. 80㎝에 26억2500만원이면 1㎝당 3281만2500원이다.
상대는 LIV 골프 최강자이자 이 무대의 지배자인 디섐보였다. 골리앗 앞의 다윗이었지만 이태훈은 주눅 들지 않았다. 최종라운드 마지막 6개 홀에서 버디 4개를 쓸어 담으며 6언더파 66타, 합계 14언더파로 연장전을 만들었다. 연장 18번 홀, 디섐보는 티샷을 물에 빠뜨리고도 세 번째 샷을 그린 근처에 붙여 파를 지켜냈다.
이태훈은 세 번 만에 그린을 밟았으나 짧은 파 퍼트를 넣지 못했다. “내리막에 훅 라인인데 홀컵 옆엔 슬라이스 라이여서 쉽지 않았다. 너무 자신 있게 친 게 문제였다”고 했다.
졌지만 패배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준 하루였다. LIV는 팀으로 경기하는 리그다. 프로야구 팀처럼 피지오·트레이닝 스태프에 여행 매니저까지 갖춰 선수를 돕는다. 팀 상금이 있고 계약금도 있다. 선수들은 늑대들처럼 무리를 이뤄 움직인다. 이태훈에게는 그 무리가 없다.
지난 1월 LIV 프로모션 대회(Q스쿨 격)에서 5타 차 수석으로 통과했지만 어떤 팀도 그를 데려가지 않았다. 그래서 팀 없이 와일드카드로 투어를 소화하고 있다. 혼자 사냥하는 외로운 늑대다.
이동 예약도, 짐 챙기는 것도, 코스 공략도 혼자다. 그는 “팀 경기를 좋아한다. 주니어 시절 캐나다 대표로 뛸 때 팀 경기가 즐거웠다. LIV에선 4ACES에 가고 싶었다. 에이스라는 이름도 멋있고, 유니폼도 마음에 들었다. 캡틴인 더스틴 존슨은 제 아이돌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러브콜은 오지 않았다.
이태훈은 외로움에 익숙하다. 캐나다 교포로 주로 한국에서 활동했다. “김치를 엄청 좋아한다. 오늘 김치 파워를 보여줬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인 정서가 강하지만, 캐나다인도 한국인도 아니라서 경계인으로 살아왔다.
한국을 거점 삼아 아시안투어를 다니며 실력을 쌓았고, 국적 때문에 화려한 스폰서도 든든한 조직도 없이 버텼다. 대신 가족이 늘 곁에 있었다. 투어를 따라다니는 가족이 그에게는 팀이나 다름없다.
LIV에서는 앤서니 김이 그 빈자리를 채워줬다. 다섯 살 차이의 두 사람은 어릴 적 같은 코치 밑에서 골프를 배웠다. 앤서니 김 복귀 후 아시안투어와 LIV 프로모션 대회에서도 마주쳤다. 앤서니 김과 가끔 식사도 한다. 부상 공백을 딛고 LIV 무대에서 되살아난 앤서니 김은 이태훈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다.
이태훈은 “앤서니 김이 늘 ‘쫄지 마, 너 잘 치잖아’라며 힘을 북돋워줬다”면서 “(앤서니) 형은 배짱이 대단하다. 나는 그에 비하면 아직 심장이 작다. 형에게 더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상금이 크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다. 정말 우승 트로피를 들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30억원이 넘는 상금을 어떻게 쓸 거냐는 질문에는 “융자를 끼고 집을 샀는데 빚을 갚겠다”며 활짝 웃었다. “한국은 코스가 좁은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으니 자신 있게 칠 수 있고 롱게임도 좋아진다”고 언급한 그는 “나도 할 수 있으니 다른 선수들도 와서 치면 될 것 같다”고 후배들에게 손짓했다.
이태훈은 LIV 역사상 처음으로 와일드카드 중 유일하게 연장전에 갔다. 우승이 근처에 있다. 수석 합격자를 외면했던 팀들은 이제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외로운 늑대는 살아남으면 무리의 리더가 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