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용서 같은 것도 없다. 한마디로 인정사정없다. ‘가차 없다’는 이런 의미들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냉정함, 냉혹함, 단호함, 매서움, 때로는 무자비함을 느끼게 한다. 이 말이 없었다면 다음 문장들은 주저리주저리 더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그 말에 가차 없는 비판을 했다.” “가차 없이 처벌했다.” 그런데 ‘없다’를 떼어 놓고 보면 ‘가차’는 적잖이 낯설다. 용서? 인정? 이런 말들과는 관련이 없다.
한자를 만드는 방법에 여섯 가지, 즉 육서가 있다. 상형, 지사, 회의, 형성, 전주, 가차다. 여기 이 ‘가차’와 관계가 있다. 가차가 지닌 뜻은 ‘임시로 빌리는 것’. 가차는 어떤 뜻을 나타내는 한자가 없을 때 음이 비슷한 글자를 빌리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스스로 자(自)’ 자도 가차된 글자 가운데 하나다. ‘자(自)’는 본래 사람의 코를 본떠 만든 글자로, ‘코’를 뜻했다. 이후 ‘스스로’라는 뜻을 적기 위해 이 글자를 빌리게 됐다.
‘콩 두(豆)’ 자는 제사에 쓰는 그릇 ‘제기’를 뜻했었다. 제기에 콩을 주로 담았었는지 ‘콩’을 나타내는 글자로 가차됐다. ‘올 래(來)’도 본래는 ‘보리’를 가리키는 글자였는데, ‘오다’는 뜻을 나타내려고 빌렸다.
이 ‘가차’에서 ‘가차 없다’는 표현이 시작됐다. “가차 없다”고 하면 더 이상 다른 방법은 안 된다는 말이 된다. 임시적인 것은 허용치 않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가차’의 의미는 흐려지고 ‘가차 없다’는 새로운 뜻을 가진 말이 됐다. “사정을 봐주는 것도, 용서도 없다”는 걸 뜻하는 관용구처럼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