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3월 16일 오후 5시, 1만4000명을 수용하는 독일 베를린의 체육관, 스포르트팔라스트(Sportpalast)의 문이 열렸다. 오후 8시, 연단에 오른 히틀러가 들뜬 표정으로 흥분해 있는 군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의 목표는 독일 국민을 보존하는 것이며, 우리의 목적은 다른 민족을 억압하거나 우리를 둘러싼 다른 민족에게 억압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방식대로 행복하게 하라.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행복할 것이다.”
이는 단지 민족자결주의를 외치는 것이 아니었다.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재무장하겠노라는 선언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가 그렇다. 우리는 무기를 빼앗겼고 국방력을 상실한 독일은 무시받고 학대당했다. 우리는 15년간 억압당했다. 우리는 타국의 증오와 원한에 휘둘리지 않으리라!” 독일의 재무장, 더 나아가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알리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1919년 6월 28일 파리 근교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조인된 제1차 세계대전 강화조약이었다. 독일의 모든 해외 식민지를 승전국인 미국·영국·프랑스 등이 나눠 갖고, 독일은 주민과 영토의 10%가량을 빼앗기며, 군병력의 10만 명 제한 및 무기 생산 금지, 총 1320억 마르크의 전쟁 배상금을 10년 만에 지불하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협상의 진행 과정을 보며 영국의 관료이자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근심에 사로잡혔다. 이토록 가혹하고 굴욕적인 강화조약은 오히려 화근이 될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관직을 내려놓고 『평화의 경제적 결과』라는 책을 써서 경고했지만, 결국 15년 만에 케인스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휴짓조각이 되었고 재무장한 독일은 주변국을 향한 침략을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는 달랐다. 전범국인 독일과 일본에 경제 성장과 부활의 기회가 제공됐다. 처벌과 응징보다 평화와 번영, 공존을 추구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80여년이 흘렀다. 세계가 보복과 원한으로 점철되어 있던 어리석은 과거로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