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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숙의 시선] 우리는 이 게임을 해본 적이 있다

중앙일보

2026.03.15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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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숙 경제부장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주인공 성기훈(이정재)은 목숨을 담보로 한 456억원짜리 게임(시즌 1)에서 겨우 살아남는다. 456억원을 쥐고 도망가는 대신 그는 다시 게임(시즌 2)에 뛰어든다. 게임의 룰을 알고 있으니 이번엔 다를 것이란 믿음이 그에게 있었다. 살벌한 첫 번째 게임을 마치고 공황에 빠진 참가자들에게 성기훈은 외친다. “난 이 게임을 해봤어요.”

2008년과 닮은꼴 고유가 사태
‘이번엔 다르다’ 반복되는 착각
부채위기 외면한 채 대증요법만

결과는 본 그대로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게임을 해봤던 성기훈조차 말이다. 단 1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 참혹한 결말을 피하지 못했다. 피 튀기는 서바이벌 스릴러 드라마와 딱딱하고 어렵기만 한 경제·금융사 연구 사이 통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하버드대 교수인 케네스 로고프와 카르멘 라인하트가 같이 쓴 책 『이번엔 다르다(This Time Is Different)』는 수백 년에 걸친 경제위기의 역사를 다룬다. 여러 차례 반복된 위기에서 찾아낸 공통점을 책 제목과 같은 ‘이번엔 다르다 증후군’으로 축약했다.

위기의 수순은 이랬다. 먼저 빚이 쌓인다. 과도한 유동성과 차입은 정부가 실제보다 경제 성장에 더 기여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집값과 주식 가격이 오르고, 금융권은 안정적이고 수익을 잘 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갑작스런 사고나 변수를 계기로 시장의 신뢰가 붕괴하고 경제는 위기의 절벽 아래로 추락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게 ‘이번엔 다르다 증후군’이다.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웠고, 일을 더 잘해낼 뿐 아니라 똑똑해졌다는 착각이다. 하지만 두 학자가 방대한 데이터를 토대로 낸 결론은 책 제목과 정반대였다. 성기훈이 그랬던 것처럼 위기는 여지없이 찾아왔고, 역시 다르지 않았다.

올해는 2008년과 무섭게 닮아있다. 당시 이란의 핵 프로그램이 수면 위로 떠오른 후 이라크 전쟁까지 겹치며 중동의 지정학적 위험이 커졌다. 공급 불안에, 부풀어 오른 신흥국의 수요까지 더해져 석유를 포함한 원자재 가격은 고공행진을 시작했다. 2008년 국제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 극단으로 치닫는다. 그해 이명박 정부는 매해 7% 성장,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위 경제대국을 달성한다는 ‘747 공약’을 내걸고 호기롭게 출범했지만, 눈앞에 서 있는 건 고유가·고환율·고금리의 벽이었다.

출범 첫해부터 정부는 대책을 퍼부어야 했다. 유류세를 낮췄고(3월), 공정거래위원회·국세청을 동원해 석유·통신비·가공식품 등 물가와 관련한 전방위 사재기·담합 조사(6월)를 벌였다. 전에 없던 대책도 등장했다. ‘고유가 극복 민생 안정’ 문패를 달고 추가경정예산까지 편성(6월)했다. 바로 전해 더 걷힌 세금을 추경 재원으로 활용해 유가환급금 명목으로 1인당 최대 24만원씩 지급했는데, 재난지원금의 원조 격이다. 전국 주유소 기름값을 공개하는 오피넷(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시스템)이 시작된 것도 그해 4월이었다.

그래도 오르는 유가와 물가를 막을 순 없었다. 2008년 7월 국제유가는 역대 최고가인 배럴당 147달러까지 올라선다. 하지만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유가는 수직으로 추락한다. 9월 미국 대형 투자은행(IB)인 리먼 브라더스 파산 때문이었다. 고유가와 맞물린 경기 침체는 허술한 빚(서브프라임 모기지)이 부풀린 부동산·금융시장의 거품을 붕괴시키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 그 유명한 세계 금융위기의 시작이다. 결국 위기를 덮은 건 더 큰 위기였다.

13일(현지시간) 뱅크 오브 아메리카(BofA)의 최고투자전략가 마이클 하넷은 “올해 자산시장 움직임이 2007~2008년과 불길할 정도로 닮았다”고 경고했다. 중동의 지정학적 위기가 촉발한 고유가, 기업 사모대출 불안,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인한 중앙은행의 실기 가능성. 그가 지적한 닮은 점은 차고 넘친다.

2008년과 올해를 비교했을 때 물론 다른 점도 있다. 특히 한국 입장에서 말이다. 724조원이었던 가계빚은 1979조원으로 3배 가까이 불어났고, 국가채무는 309조원에서 1302조원으로 4배 넘게 치솟았다. 증시의 변화가 가장 드라마틱하다. 2008년 3월 3조5000억원에 불과했던 ‘빚투’(코스피·코스닥 신용거래융자) 규모는 이달 32조원으로, 10배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차올랐다.

이재명 정부가 고유가 대책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이명박 정부 때와 닮은꼴 조치가 대부분이지만, 29년 전 폐기한 낡은 제도인 석유가격 고시제(최고제라고 이름 붙였지만 원래 명칭은 이거다)까지 다시 꺼내 들었다. 재정에서 돈이 나가는 대증요법이 대부분이다. 로고프와 라인하트는 많은 부채에 의존하는 경제는 위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이번엔 제발 다르길 바랄 뿐이다.





조현숙([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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