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두 얼굴의 ‘바냐’다. 지난해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고전 ‘헤다 가블러’를 같은 시기 무대에 올렸던 국립극단과 LG아트센터가 올해는 러시아 대문호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로 비슷한 시기 관객을 찾는다. ‘이색(二色) 무대’ 대결 구도가 고전 작품에 대한 관심을 키우는 흥행 코드로 쓰이는 셈이다. 두 단체는 “원작만 같은, 다른 작품”이라고 입을 모은다.
1897년 희곡으로 발표됐고 1899년 러시아에서 초연한 ‘바냐 아저씨’는 현재까지도 전 세계 무대에 가장 자주 오르는 연극계 고전이다. 죽은 누이의 남편과 매형을 위해 평생 헌신했으나 그들의 실체를 깨닫고 절망에 휩싸이는 ‘바냐’와 그를 위로하는 조카 ‘소냐’의 이야기를 담았다.
국립극단은 오는 5월 22일부터 31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바냐 아저씨’를 원작으로 한 연극 ‘반야 아재’를 공연한다. 국립극단은 지금까지 1986년과 2004년, 2013년 총 세 번의 다른 ‘바냐 아저씨’를 무대에 올렸다. 이번엔 제목에서 드러나듯 원작을 한국적으로 재해석했다. 배경은 원작의 러시아 시골 영지 대신 한국의 농촌이다. 인물 이름도 바꿨다. ‘바냐’는 ‘박이보’, ‘소냐’는 ‘서은희’다. 국립극단 관계자는 “삶의 부조리와 인간의 운명을 애잔하면서도 경쾌한 희극성으로 담아낸 19세기 원작이 21세기 한국 사회 삶의 실체를 비춰낸다”고 소개했다. ‘남자충동’ ‘파우스트 엔딩’ 등을 흥행시킨 조광화가 연출을 맡았다.
LG아트센터는 같은 달 7일부터 31일까지 ‘바냐 삼촌’을 무대에 올린다. 국립극단 작품 대비 원작에 충실하되 ‘동시대성’을 강조했다. 이현정 LG아트센터장은 “고전이 현재의 관객에게 닿도록 오늘날의 언어로 새롭게 풀어내 깊은 공감과 감동을 선사할 것”이라고 전했다. 2011년 결성된 공동 창작 집단 양손프로젝트의 멤버로, 배우이면서 연극 ‘타인의 삶’을 통해 연출력도 인정받은 손상규가 연출한다.
두 단체는 지난해 5월 ‘헤다 가블러’에 올해도 같은 작품을 공연하는 것에 대해 ‘우연’이라고 했다.
지난해 이혜영(국립극단)과 이영애(LG아트센터)의 ‘두 헤다’가 주목받았듯, 이번에도 출연 배우의 면면이 시선을 끈다. 국립극단은 소냐 역에 심은경, 바냐 역에 조성하를 캐스팅했다. LG아트센터에서 소냐 역은 고아성, 바냐 역은 이서진이 맡는다.
특히 영화와 드라마에서 활발히 활동해온 두 젊은 여배우의 연극 무대 대결이 관심을 모은다. 올해 일본 영화 최고 권위인 ‘키네마 준보’에서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심은경은 2016년 일본에서 연극 ‘착한 아이는 모두 보상받을 수 있다’에 출연한 적 있지만, 국내 연극 연기는 처음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 ‘설국열차’와 독립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 등에 출연하며 장르를 넘나드는 연기력을 보인 고아성은 이 작품으로 첫 연극에 도전한다. 이서진 역시 연기 데뷔 27년 만에 처음으로 연극 무대에 나선다.
공연계에선 이런 대결 구도를 흥행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한 공연 제작사 관계자는 “같은 원작을 서로 다른 해석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은 강력한 관람 동기가 될 수 있다”며 “특히 스타 배우의 화제성이 더해질 경우 관객의 비교 관람 욕구를 자극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해외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1996년 영국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두 편의 ‘헤다 가블러’가 경쟁적으로 무대에 올랐고, 당시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이를 ‘가블러 vs 가블러’라는 제목으로 조명하기도 했다.
김교석 평론가는 “고전 원작 작품들은 대중에 다소 어렵고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며 “극단 간 맞대결과 배우 간 연기 대결이라는 코드가 이런 작품에 대한 관심을 키울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간 드라마나 영화에서 쓰인 배우 간 맞대결 흥행 코드가 연극계로도 점차 이어지는 것 같다”라고 짚었다.
김성희 평론가도 “고전의 다양한 변주를 관객들이 동시에 마주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시간이나 비용을 고려할 때 비슷한 시기에 같은 원작의 작품 두편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관객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라며 “대형 극단들이 이런 작품들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편이 관객의 접근성 측면에서 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