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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의 마음 읽기] 흥얼흥얼 봄노래

중앙일보

2026.03.17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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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
봄이 되어 꽃은 피고 새가 운다. 풀이 푸릇푸릇 돋는다. 다시 텃밭에서든 과일나무 아래에서든 틈틈이 노동을 할 시간이 되었다. 얼마 전에 봄의 흥취를 노래한 가곡들을 듣다가 ‘봄이 오면’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이처럼 좋았나 싶었다. 특히 “나는야 봄이 되면 그대 그리워 종달새 되어서 말 붙인다오. 나는야 봄이 되면 그대 그리워 진달래꽃이 되어 웃어본다오”라는 대목에 무릎을 툭 치고 말았다. 봄날에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종달새와 진달래꽃에 이입시킨 멋진 표현이었다.

큰 원 그리듯 빙 돌아오는 봄
책 필사나 노래 부르기도 좋지만
해로운 일 한 가지 그만둘 결심도

묵은 가지에 새싹이 뾰족이 움트고 땅에서부터 풀이 일어나는 때를 맞으면 무언가 돌아오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마치 큰 원을 그리듯이 한 바퀴 빙 돌아서 다시 오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순환하는 것에 대해 사색하게 되는 셈인데, 이렇게 돎에 대해 궁리를 하다 보면 생각과 마음이 유연해지는 느낌도 든다. 잠시 만나고 잠깐 헤어지는 일, 큰 기쁨과 깊은 슬픔, 좋은 운수와 사나운 운수, 기운차게 일어나는 번성과 차차 쇠하여 보잘것없이 되는 것 등을 조금은 떨어진 자리에서 보게 된다. 이 양쪽 각각의 세력과 형국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바뀌기 마련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인생이 가파른 언덕만 힘들게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훨씬 평탄하고 수월한 길도 가게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지금 맞닥뜨린 난국에 대해서도 풀어가고 헤쳐 나아갈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돌아오지 못하는 것도 있다. 가령 작고한 사람도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풀과 새와 꽃은 계절이 바뀌어 다시 이 봄에 우리에게 돌아오지만 세상을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못한다. 환한 봄날에 느끼는 막연한 서글픔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세상을 떠난 사람이 문득 생각나지만 그이가 다시 곁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현실적 자각에 있기도 하다.

하지만, 봄이 왔으니 난폭하고 어둡고 무겁고 이해가 불가한 이 세계의 일에 대한 걱정과 우려와 분노를 잠시 밀쳐놓고, 봄노래를 애써 흥얼흥얼하려고 한다. 겨를을 내어서 유채꽃밭을 찾아가고, 보리밭에도 가본다. 겨우내 잠들어있다시피 했던 서재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책상에 간만에 앉아 시집을 읽고 옛글을 읽는다. 그리하여 엊그제 밤에는 김수영 시인이 쓴 시 ‘봄밤’의 시구를 읊어보기도 했다.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行路)와 비슷한 회전(廻轉)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人生)이여”라고 노래한 시구를 읊어서 마음 한쪽에 들였다. 좋은 글을 읽으면 내 글을 쓸 의욕이 생겨난다. 그래서 이 봄에 시를 지을 작정도 세워보았다.

새롭게 시작하는 근사한 일이 하나라도 이 봄에 있어야겠다고 혼자 생각을 또 해보았다. 그러곤 여러 날 무엇을 할까 마음속으로 이리저리 따져가며 깊이 생각한 끝에 필사(筆寫)를 해야겠다고 결정했다. 요즘 사람들 사이에 무언가를 베끼어 쓰는 필사 열풍이 불고 있기도 하다니 해볼 만하다고 여겼다. 필사의 대상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시도 좋고, 고문도 좋을 것이다. 한글로 된 것도 좋고, 한자로 쓴 것도 좋을 것이다. 엘뤼아르의 시집도 좋고, 언젠가 공부했던 『고문진보』도 유익할 것이다. 필사를 매일 하다 보면 한 권의 책을 완독하게 될 터이니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다 필사한 후에는 애쓴 나에게 후한 선물을 줘도 멋진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봄날에 한 가지 풀어야 할 질문이 하나 있다. 며칠 전에 어떤 분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가 그분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지 않는 일이 한 가지는 있어야지요.” 이 말씀에 얼마간 충격을 받았다. 더 추가해서 해야 할 일만을 계획했는데, 내가 습관적으로 되풀이해 오던, 대개는 해로운 일 가운데 한 가지를 꼽아서 당장에 그만두면 어떻겠느냐는 뜻의 제안이었다. 아직 이 질문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밀린 과제가 있는 느낌이다. 물론 봄노래를 흥얼흥얼하는 일이나 필사를 시도하는 일도 나무랄 게 없겠지만.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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