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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영의 시선] 벚꽃 아래 날아든 호르무즈 청구서

중앙일보

2026.03.17 08:16 2026.03.17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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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영 논설위원
매년 3월, 워싱턴 DC의 포토맥 강변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벚꽃은 미·일 우호의 상징으로 통한다. 1912년 3월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 당시 도쿄시장이 워싱턴DC에 선물한 쇼메이 요시노 품종의 벚나무 묘목 3000여 그루가 그 시초가 됐다. 당시 일본 내에서 “일본의 정신(벚꽃)을 장차 적국이 될지도 모르는 나라에 바친다”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오자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 묘목들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격랑 속에서도 살아남아 오늘날 미·일 관계를 강화하는 ‘소프트파워’ 역할을 하고 있다.

파병 압박 속 만나는 미·일 정상
안보·경제 위해 미 ‘용병’될 판
동맹 의무와 국익 사이 고민 깊어

그로부터 한 세기가 넘게 흐른 오는 19일, 다카이치 사나에(高市 早苗) 일본 총리가 워싱턴 땅을 밟는다. 다카이치 총리는 미국 건국 250주년에 맞춰 오는 7월 250그루의 벚나무를 추가로 기증하고, 아키타현의 자랑인 화려한 불꽃놀이를 워싱턴 하늘에 수놓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화려한 벚꽃과 불꽃놀이의 이면에는 전례없이 차가운 ‘동맹의 청구서’가 기다리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내미는 청구서는 노골적이다. 이란과의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상황에서 트럼프는 한국과 일본 등 핵심 동맹국을 향해 호르무즈 해협으로의 함정 파견을 거세게 압박하고 있다. “너희의 에너지를 실어 나르는 선박은 너희가 직접 지키는 것이 상식”이라는 논리로 시작된 압박은 “우리가 군사력이 부족해서 부르는 게 아니다. 너희가 동맹으로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 진정성을 확인하려는 것”이라며 연일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트럼프 특유의 거래적 동맹관이 일본을 비롯한 동맹국들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다카이치 총리에게 이번 파병 요구는 단순한 군사적 결정을 넘어 정권의 명운이 걸린 거대한 시험대다. 스스로를 ‘아베 신조의 적통 계승자’로 자임하며 ‘강한 일본’을 외쳐온 그에게, 이번 사태는 아베 전 총리가 구축해 놓은 안보 법제의 실효성을 증명해야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일본 자위대는 1991년 걸프전 직후 페르시아만에서 기뢰 제거 작업을 벌인 전례가 있다. 이후 아베 정부는 2015년 안보 관련법 개정을 통해 집단 자위권 행사의 길을 열었고, 그 대표적 예시로 ‘호르무즈 해협 봉쇄 시 기뢰 제거’를 명시했다. 즉, 법적 근거는 이미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법리 검토에 들어가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일본 정부 내부에서는 현재의 이란 정세를 안보법상 ‘존립위기사태’(일본의 존립이 위협받는 상황)나 ‘중요영향사태’(미군 지원이 필요한 상황)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신중론이 우세하다. 일본은 이미 254일치에 달하는 방대한 비축유를 확보하고 있는데다 미국과 이란 사이에 실제 교전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미군을 후방 지원하는 것은 평화헌법과 현행법의 테두리를 벗어날 위험이 크다. 결국 가능한 범위는 ‘해상경비업무’ 명목으로 일본 관련 선박을 호위하는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이같은 신중론의 배경엔 이번 전쟁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여론이 자리잡고 있다. 지난달 이란 남부 미나브 지역의 여자 초등학교에서 발생한 미군의 오폭 사고로 175명의 어린 여학생이 목숨을 잃은 참상을 지켜본 일본 내 여론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다. 아사히 신문의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이란 공격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82%에 달했다. 특히 공격의 정당성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는 다카이치 총리의 태도를 질타하는 목소리도 절반을 넘었다. 자민당 내부에서조차 “과거 아베 전 총리가 ‘조사·연구’라는 우회로로 실리를 챙겼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도덕적 위기”라는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다.

다카이치가 이토록 궁지에 몰리면서도 워싱턴으로 향하는 또 다른 이유는 ‘중국’이다. 취임 직후 “대만 유사시는 곧 일본의 유사시”라며 강경 발언을 쏟아낸 대가로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희토류 수출 금지’라는 경제 보복을 당하고 있다. 일본 산업계가 비명을 지르는 상황에서, 다카이치는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트럼프가 곧 있을 미·중 정상회담에서 일본의 희토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미국의 차세대 미사일 방어 체계인 ‘골든돔’ 참여와 전례 없는 규모의 방위비 증액, 그리고 대규모 대미 투자 보따리를 풀어놓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일본은 지금 안보와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미국의 ‘용병’ 역할을 자처해야 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거래를 이어가고 있다.

19일 펼쳐질 미·일 정상회담은 결코 이웃 나라의 구경거리가 아니다. 똑같은 파병 청구서와 방위비 압박을 마주하고 있는 한국에 이번 회담은 가장 정교한 ‘참고서’가 될 것이다. 미·일 정상회담을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소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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