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강점은 무엇이고 약점은 무엇인지. 당장 발등의 불을 끄느라 바쁜지 혹은 위기 속에서도 멀리 내다보는 여유를 갖췄는지. 위기가 닥칠 때 같이 불을 꺼줄 친구는 있는지.
한반도 서쪽으로 6500㎞ 떨어진 험준한 땅, 이란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묻고 있다. 우선 중동 지역에서 들여오는 석유, 가스에 크게 의존하는 에너지 수입국으로서의 대응책을 묻고 있다. 안보 관점에서는 주한 미군 사드 포대의 갑작스런 이동 그리고 호르무즈 해협 안전을 위한 해군력 파견 요청에 이르기까지, 까다롭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들이 이어지고 있다.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시민들의 저항 시위를 무자비하게 탄압해 온 이란의 신정 정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며, 그 폭압 정권의 리더를 제거하고 폭격을 퍼붓는 미국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라는 질문도 외면할 수 없다.
위기의 초동 대응은 신속, 원활해
에너지, 안보, 동맹, 경제 아우르는
장기 비전은 상대적으로 불분명
정부·시민사회 함께 지혜 모아야
언제나 그래왔듯이 우리는 중동 위기 앞에서 단기적인 대응은 빠르게 효과적으로 해내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과 시민들이 숙고하고 합의해야 하는 중장기 전략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않다. 달리 말해, 단기 이슈에 몰두하면서 장기적인 방향을 잃어버리는 ‘민주정치의 근시안 딜레마’는 여전히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 다가오는 선거에 올인하는 정치 세력들이 정치를 지배하는 한, 민주정치는 장기 비전을 갖기 어렵다고 비판했던 슘페터의 딜레마는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먼저 중동 위기에 대한 우리 정부의 발 빠른 대응부터 살펴보자. 국제 유가는 (서부 텍사스유 기준) 중동 전쟁과 함께 단번에 배럴 당 100달러를 돌파하면서 국내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게다가 호르무즈 해협 위기로 인해 유조선들의 발이 묶이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에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 6일 UAE로부터 석유 600만 배럴을(국내 1일 소비량의 2배 이상의 규모) 긴급 수입하는데 합의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바로 이틀 후인 8일 UAE 수송기는 우리가 긴급히 공급하기로 한 천궁II 유도탄 30여기를 가져가기 위해 대구 공항에 도착하였다. 이란의 미사일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천궁II 유도탄이 필요했던 UAE와 석유 수급의 안정성이 절실했던 한국의 절묘한 동행이다.
발 빠른 대응은 휘발유 최고가격제 긴급 도입과 이를 통한 시장 불안 심리의 안정을 포함한다. 이에 따라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율은 무려 67%에 이르고 있다. 중동 위기, 인플레의 그림자 속에서도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우리가 중동 위기 대응에 몰두하는 동안, 한반도의 동쪽 방향, 태평양에서는 중견 강국들의 의미심장한 움직임들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천연가스 생산 5위의 자원 대국, 캐나다의 카니 총리는 지난 6일 일본을 방문해서 안보, 에너지, AI, 희토류 등을 중심으로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맺는다고 발표했다. 캐나다 총리는 이에 앞서 또 다른 자원 대국인 호주를 방문하고 두 나라가 안보, 특히 해양 안보, 무역, AI, 핵심 자원에서 긴밀한 협력을 강화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러한 움직임들을 단지 정상들 간의 방문에서 흔히 이뤄지는 의례적 발표로만 보기는 어렵다. 카니 캐나다 총리는 연초에 지구촌 온라인을 달구었던 유명한 연설을 통해 미국이 주도해 온 2차 대전 이후의 제도 기반 국제 질서가 분명히 끝났음을 선언하고 포스트 아메리카 시대의 총대를 메고 나선 바 있다. 이제 세계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찼고 미국이라는 초대국은 이제 동맹이나 우호국들과의 관계마저 현금화하려는(monetize; 관세 압박을 통한 대미 투자 요구를 가리킨다.)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결국 대안은 뜻을 같이 하는 중견 국가들끼리 협력해야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가치 기반 현실주의) 능력과 뜻을 갖춘 “중견국들끼리 협력하지 않으면, 중견 국가들은 초강대국들이 요리하는 메뉴가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 카니 총리의 주장이다. G7에 속한 경제 강국이면서 자원 대국이고 미국과 긴밀하게 엮여 있으면서도 애증 관계를 지닌 캐나다가 주도하는 이러한 움직임은 위기의 초동 대응에 정신없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혼돈의 세계 속에서 한국은 어떤 미래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가? 지정학의 태풍이 불 때마다, 우리의 방위산업, 조선업, 반도체 산업을 지렛대 삼아 위기를 해결하며 살아가는 생존형 중견국가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대를 헤쳐갈 비전을 공유하면서 좀 더 안정적인 협력 프레임을 만들어 내는 주도적 중견국가로 올라설 것인지. 반도체 칩, 무기체계, 전함 건조 능력 등의 물리적 힘을 넘어 우리가 중견 협력국들의 마음을 잡아끌 무형의 자산, 가치는 무엇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맹과 중견국 네트워크를 함께 아우르는 국가 대전략의 방향은 무엇일까. 정부와 시민사회가 함께 마주한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