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단 한 번도 홀로 전쟁을 치른 적이 없다. 한국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 나토 회원국은 미국 군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싸웠다.”(2024년 2월, 옌스 스톨텐베르그 당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나토 무용론에 반박하기 위해 꺼낸 나토 수장의 ‘집단 방위권’ 강조가 2년여 뒤 역설로 돌아왔다. 트럼프의 호르무즈 해협 전투함 파견 요청을 나토 동맹 대부분이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라며 거부하고 사실상 미국 홀로 싸우라는 뜻을 밝히면서다. 트럼프는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은 한국과 일본까지 거론하며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는데, 그의 ‘장대한 분노’가 동맹까지 덮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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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타냐후만 믿다…나토 동맹의 ‘역습’
트럼프가 유독 분노한 데는 이란의 반격에 미군 사망자가 10명을 넘어가는 등 피해 규모가 불어나는 데도 나토 동맹국이 나토 조약상 ‘집단 방위권(제5조)’ 발동에 선을 긋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나토 조약은 현대 국제 안보 체제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 방위(Collective Defense) 조약으로 꼽힌다. 핵심은 나토 회원국 중 한 나라가 공격당하면 모두가 공격당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다만 5조는 집단 방위권의 발동 전제를 ‘북미와 유럽(in Europe or North America)’으로 한정하고 있다. 또 해당 조약은 공격이 발생했을 때(an armed attack occurs)를 상정하는데, 이번 사례는 이란이 미 본토에 위협을 가했다는 점이 명백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는 뜻이 될 수 있다.
나토 창설(1949년 4월) 이래 5조가 발동된 사례는 2001년 미 9·11 테러 때가 유일하다. 당시 19개 나토 회원국 전원이 국제안보지원군(ISAF) 등 직·간접적으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도 개입 근거 조항이 있지만, 전제를 ‘태평양 지역’에서 발생한 무력 공격으로 한정하고 있다. 미·일 상호방위조약도 ‘일본의 관할 영토’로 명시하고 있다. 한·일은 더더욱 중동 사태에 관여할 ‘계약서상’ 의무는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조약 적용 여부를 떠나 동맹이 군사적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직·간접적 지원을 해온 게 그간 미국 중심으로 구축해온 국제질서의 암묵적인 관례였는데, 이번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이와 관련, 유지훈 한국국방연구원(KIDA) 박사는 “미국의 동맹국들의 시각에선 이번 전쟁이 공통의 이념이나 목표, 이익에 기반을 둔 게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이란 사태를 기점으로 ‘동맹도 전쟁에서 등을 돌릴 수 있다’는 새로운 안보 개념이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건 그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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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 받고도 침묵 튀르키예…“내 전쟁 아니다”
실제 미국의 유럽 동맹들은 앞다퉈 “호르무즈 개방은 나토의 임무가 아니다”(영국 키어 스타머 총리), “이 전쟁은 나토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명백하다”(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며 거리를 두고 있다.
이런 상황이 조약상 의무가 아니라 정치적 의지의 문제라는 건 이란의 튀르키예 공격을 나토가 다루는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개전 초반부터 이란은 미국의 전력이 모여있는 튀르키예 남부 공군기지를 겨냥해 탄도미사일 공격을 하고 있다. 나토 일원인 튀르키예에 대한 공격은 집단 자위권 발동 여부를 협의하는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런데도 당사자인 튀르키예가 관련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나토 역시 유보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여기엔 미국의 전쟁도 아닌 ‘트럼프의 전쟁’은 지원하지 않겠다는 나토의 정무적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군사 대비 차원에서 미국의 오랜 노력은 중동에서 발을 빼 인도 태평양 지역으로 전력을 집중하는 것이었는데, 트럼프의 인식과 행동은 미국의 국가안보전략(NSS), 국방전략서(NDS) 등 미국의 국방 전략에도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고 짚었다.
나토 회원국들은 정작 나토의 일원도 아닌 우크라이나에 대해선 미국을 필두로 앞다퉈 우크라이나를 지원했다. 독일·영국·프랑스 등이 패트리엇과 스톰 섀도·스칼프 장거리 미사일 등 무기 체계를 지원한 것과 다른 양상인 셈이다.
미국이 이번 전쟁을 사전 예고나 협의 없이 이스라엘과 독단적으로 시작했다는 점도 작용했을 수 있다. 트럼프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교감으로 시작된 이번 이란 공습 작전에 대해 동맹국들은 사전 공유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여기다 미국의 이란 공격이 ‘예방(preventive) 타격’ 논란을 부른 것도 영향을 줬을 수 있다. 예방 타격은 상대국으로부터 미사일 공격 징후가 임박할 때 사전 조치하는 선제공격과 달리 국제법 위반 논란이 있다. 앞서 AP통신은 미 의회 비공개 보고에서 미 정보 당국이 이 지역에서 이란이 미국을 향해 선제 타격을 할 것이란 정보는 없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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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식 동맹’ 되치기당한 트럼프 ‘폭주’ 우려
무엇보다 이번 국면에선 그간 동맹을 거래적 관점에서 보고 조약 동맹의 기반을 거침없이 흔들어 왔던 트럼프 행정부의 자업자득 측면도 없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동맹 방위 기여에서 어떻게든 발을 빼려는 트럼프식 고립주의가 역으로 미국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불러온 셈이다.
이는 향후 미국 주도의 ‘동맹 질서’가 한층 이완하는 새로운 구도가 형성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으로 이어진다. 실제 미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최근 미국·캐나다·영국·프랑스·독일 5개국 1만 28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절반 이상은 “미국보다 중국이 의지할 만한 강대국”이라고 답변했다.
또 나토 동맹이 협조하지 않는 것을 트럼프가 동맹을 향한 ‘안보 무임승차’ 인식을 강화하는 명분으로 쓸 가능성이 크다. 동맹 압박의 강도가 더 세질 수 있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정부 안팎에서 나오는 이유다. “미국으로부터 호르무즈 해협 관련한 공식 요청이 오지 않았다”며 거리를 둬 온 한국도 피해가긴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당장 동맹의 지원 없이 이란 사태를 자력 돌파하기 위해 주한미군을 포함, 전 세계 주둔 미군의 자산 차출 규모가 확대될 수 있다. 관세 보복도 항상 유효한 카드로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실망한 트럼프가 감정적으로 반응하며 동맹 간 변동성이 더 커진 상태”라며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어떤 압박이 와도 일단 먼지가 가라앉고 시야가 확보될 때까지 섣불리 움직여선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19일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앞둔 일본이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