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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지가 없어 라면 못 만든다, 호르무즈 봉쇄 길어지면 닥칠 일

중앙일보

2026.03.18 13:00 2026.03.18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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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아랍에미리트(UAE)로부터 1800만 배럴의 원유를 긴급 도입한다고 18일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 특사로 UAE를 방문하고 돌아온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이날 “(UAE 측이) 한국은 원유 공급에서 최우선이라고 분명히 약속해줬다”고 말했다. 앞서 6일 확보한 600만 배럴을 포함하면 UAE로부터 원유 총 2400만 배럴을 들여오게 된다.

비상 상황 속에서 거둔 외교적 실적이지만, 역설적으로 현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준다. 이란은 믈라카해협, 수에즈운하와 함께 3대 초크포인트(해상 운송 요충지)로 꼽히는 호르무즈해협 봉쇄를 본격화하고 있다. “호르무즈해협은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다”(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이란 국회의장)는 경고는 과장이 아니다. 낚싯배로 위장한 드론 보트의 자살 공격이 시작됐고, 기뢰와 미사일 투입도 예고됐다.

지난해 하루 평균 1570만 배럴의 석유가 이 길을 지났다. 전 세계 해상 석유 물동량의 3분의 1이 넘는다. 약 6500㎞ 떨어진 한국도 위기에 직면했다. 수입 원유의 70%는 중동에서 오고, 그중 90%가 호르무즈해협을 거친다.

박경민 기자
지난 3주가 치솟는 유가와의 싸움이었다면 이젠 수급과의 전쟁이다. 비싼 건 비용의 문제지만 없어지는 건 다른 차원이다. 현장에선 4~5월 위기설이 돌 정도다. 실제로 정유사가 비축한 물량은 이르면 4월부터 소진된다. 추가로 확보한 물량으로도 한계다. 현재 석유 비축 물량은 약 1억9000만 배럴. 정부는 비축유로 208일을 버틸 수 있다고 설명하지만, 이는 수출을 뺀 계산이다. 지난해 국내 정유사의 수출 물량은 4억8535만 배럴로 전체 원유 도입량(9억3506만 배럴)의 51.9%다. 수출을 포함한 하루 석유 소비량은 280만 배럴. 1억9000만 배럴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은 약 68일이다. 한 정유업계 전문가는 “실제 비축유 방출을 시작했는데 전쟁의 끝이 보이지 않으면 매일 시장은 패닉에 빠질 수 있다”며 “그런 점에서 4월이든, 5월이든 위기설은 일리가 있다”고 말했다.

원유만 문제가 아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중동 및 인근 국가 수입 의존도가 70% 이상인 즉각 관리 대상 품목은 총 41개다. 반도체·정밀화학 원료로 쓰이는 헬륨이나 건설업에 필수인 석고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미 국내 산업 현장에선 이란 사태로 인한 ‘나프타 쇼크’가 라면부터 화장품, 패션 등 전방위로 엄습하고 있다.



봉지 없어 라면 못 만들고…자동차 시트 부족해 공장 설 수도

라면·과자 등 포장재의 핵심 원료인 폴리에틸렌(PE)은 원유로 추출해 만드는 나프타를 주원료로 한다. 여천NCC 등은 고객사에 ‘불가항력’을 선언했다. 석화업계 관계자는 “호르무즈해협 봉쇄가 계속될 경우를 가정하면 일부 업체는 이달 말부터 셧다운될 수 있다”고 했다.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포장재 재고 상황을 예의주시 중”이라며 “앞으로 한 달 이상 이란전쟁이 장기화할 땐 제품 생산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고 토로했다. 화장품 업계로도 위기감이 번지고 있다. 석화업체에서 공급받은 나프타를 활용해 용기 제조에 필요한 소재를 만들기 때문이다.

가구와 침대, 자동차 산업도 직격탄을 맞는 구조다. 침대업계 관계자는 “이렇게 가다간 조만간 매트리스·침대도 생산하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매트리스 폼에 주로 사용되는 폴리우레탄의 핵심 원료인 폴리올 수급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자동차 시트에 들어가는 폴리올 수급도 악화하면서 자칫 자동차 생산에도 제동이 걸릴 수 있다.

차준홍 기자
석유업계 고위 관계자는 “미국·베네수엘라 등에서 대체 물량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뛰고 있다”고 말했다. 중동산 원유는 25일이면 한국에 도착하지만 북미산은 35~40일이 걸린다. 게다가 미국 등의 원유는 대부분 경질유다. 중동산 중질유 중심의 설비를 갖춘 국내 정유사 입장에서는 정제 효율이 떨어진다. 설비 조정 등의 방법이 있지만 역시 시간이 문제다.

김형건 강원대 경제·정보통계학부 교수는 “초기부터 공급 리스크를 제대로 반영했다면 수요 또한 제어해야 하는데 정작 정부가 꺼낸 카드가 최고가격제였다”며 “한마디로 기름값 걱정하지 말고 차를 타라는 건데 현 상황과 맞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최고가격제를 하면서 5부제도 시행하는 게 앞뒤가 안 맞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16일 싱가포르에서 거래된 두바이유 현물 가격은 배럴당 153.24달러로 2월 말(71.24달러) 대비 두 배가 넘는다. 17일 기준 중동과 중국을 오가는 초대형 원유 운반선(VLCC)의 하루 운임도 47만 달러까지 치솟았다. 지난달 20일까지만 해도 15만7000달러였는데 3배가 됐다. 한국해양진흥공사는 “과거 사례를 고려할 경우 봉쇄가 해제되더라도 정상화까지는 봉쇄 기간의 2배 이상이 소요된다”고 내다봤다.

산업통상부는 이날 원유 자원안보 위기 경보를 기존 ‘관심’에서 2단계인 ‘주의’로 격상했다. 또한 품귀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나프타는 경제안보 품목으로 지정해 관리하기로 했다.





장원석.안효성.임선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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