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힘이 세다. 집단을 포섭하는 폭발력을 갖는다. 국기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싸우는 구도는 민족과 국가를 눈앞에 불러낸다. 그래서 스포츠의 승리는 쉽게 민족의 영광으로 치환된다. 근대올림픽 이후 정치는 이 휘발성 강한 내셔널리즘을 국민 단합의 동력으로 가동해 왔다.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패전국의 트라우마를 지우고 세계 무대의 복귀를 알렸다. 여자 배구의 금메달은 그 상징적 세러머니였다. 소련과의 결승전 순간 시청률 80%는 스포츠가 민족적 프라이드의 심리적 자양분이었음을 보여준다.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2002년 월드컵은 스포츠 민족주의의 끝판왕이었다. 길거리 응원을 본 외신이 ‘동원된 집단주의의 광기’로 오해할 정도였다. 그때 “대~한민국”으로 대동단결했던 우리 스포츠의 집단 서사는 찬란하고 장엄했다.
하지만 민족주의만큼 쉽게 휘발되는 것도 없다. 국가가 개인의 구체적인 일상을 보듬어주지 못할 때 내셔널리즘은 허구가 된다. 태극기와 함께 울려 퍼지는 애국가가 ‘금메달 연금’이라는 보상 체계에 기대고 있음이 드러나면서 집단 서사에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거둔 처참한 성적이 오히려 일본 엘리트 스포츠를 살리는 계기가 되었다. 2001년 ‘스포츠 진흥 기본계획’이 수립되었고, 일본 스포츠 진흥 센터(JSC)가 발족했다. 행정은 거대한 캔버스를 펼쳐줄 뿐, 붓놀림은 전적으로 현장 전문가에게 맡겨진다. 그 결과가 2020년 도쿄올림픽 금메달 27개였다. 최근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의 성적도 그 연장선에 있다.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메달 경쟁이라는 낡은 틀을 걷어내고 ‘개인의 서사’를 말하는 새로운 문법을 낳았다. 일본 대중은 이제 메달리스트에게서 ‘닛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타니 쇼헤이의 퍼포먼스를 모닝커피처럼 즐긴다. 스포츠가 그려내는 삶의 다양한 무늬를 찾아내고, 순수한 몰입의 아름다움에서 일상의 위안을 찾는다. 2024 파리올림픽에서 백혈병을 물리치고 수영장으로 돌아온 이케에 리카코(池江璃花子)는 예선 탈락에도 누구보다 많은 박수를 받았다. 스포츠는 이처럼 개인 서사의 텃밭이다.
우리의 스포츠에서 부족한 게 바로 이 개인 서사다. 메달 색깔로 전할 수 있는 이야기는 너무 제한적이고 뻔하다. 그래서 선수는 적당히 안주하고 만족해 왔다. 전성기를 뒤로하고 유튜브 예능으로 빠져나가는 레전드들의 행보가 그 단면이다. 화면 속 웃음은 상업적 엔터테인먼트일 뿐, 시민에게 스포츠의 영감을 전하지는 못한다. 연봉이라는 눈앞의 성과와 에이스라는 호칭에 만족한 우리 엘리트 스포츠는 성장과 도전 대신 좁은 울타리 안에서 스스로 대단한 줄 알았다. 최근 국제대회의 부진으로 자기만족의 거울이 산산이 깨지는 소리에 시민은 불쾌함을 느꼈다.
정책의 일관성도 중요하고, 생활체육과 엘리트 체육의 격차를 줄이는 제도적 혁신도 필요하다. 그러나 스포츠는 결국 시민의 삶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스포츠를 통해 즐거워야 하고, 선수의 퍼포먼스가 삶의 자극과 영감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시민은 스포츠를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어 간다. 왜 달리는지를 말하고, 야구장에서 왜 목청껏 응원가를 부르는지 말하게 된다.
다양한 개인의 서사를 만들자. 삐약이 신유빈이 2020 도쿄올림픽을 거쳐 2024년 파리올림픽에서 보여준 성장의 드라마는 ‘헝그리 정신’이나 비장한 태극전사에 비해 훨씬 풍부하고 세련된 이야기를 전하지 않는가. 우리가 일본의 약진에서 배워야 할 것은 메달의 숫자가 아니라, 스포츠를 개인의 도전과 성취의 이야기로 만드는 힘이다. 그렇게 된다면 성적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