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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엽의 괴짜열전] 스스로 자신을 착취한 끝에 탈진하는 현대인의 초상

중앙일보

2026.03.19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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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하는 편이 좋겠어요”라고 되풀이하다 굶어 죽은 바틀비
성민엽 문학평론가
소설 속 인물들 중에서 손꼽힐 만한 괴짜로 바틀비를 들 수 있습니다. 변호사 사무실의 조수로 일하는 바틀비는 자신을 고용한 변호사가 지시하는 업무를 “안 하는 편이 좋겠어요(I would prefer not to)”라고 말하며 거부합니다. 처음에는 문서 필사 이외의 일을 거부하다가 나중에는 필사 일도 거부하고, 해고도 거부하고, 변호사가 사무실을 옮긴 뒤에도 그 건물의 계단과 복도에 남아 이동을 거부하고, 결국 감옥에서 밥 먹는 일도 거부하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지금 보아도 기괴해 보이는데 이 단편소설이 1853년에 처음 발표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에는 얼마나 더 기괴해 보였을지 짐작이 갑니다.

허먼 멜빌의 1853년 단편의 주인공
일도, 해고도, 먹기도 거부하다 숨져

이해 못할 기행에 숱한 해석 쏟아져
“바틀비=메시아”로 보는 시각은 공허

부분 집착 말고 텍스트에 집중해야
제목의 ‘필경사’는 적절한 번역 아냐

바틀비가 일했을 법한 19세기 미국 뉴욕의 모습. [사진 성민엽]
『모비 딕』만큼 유명해진 이해 못할 소설
이 소설의 한국어 번역 제목은 『필경사 바틀비』이고 영어 원제목은 ‘Bartleby, the Scrivener: A Story of Wall Street’이며 작가는 장편소설 『모비 딕』으로 유명한 허먼 멜빌입니다. 1819년생인 멜빌은 뉴욕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돌아가신 뒤 경제적으로 어려워져서 스무 살 때부터 선원 일을 시작했습니다. 1841년부터 포경선을 탔고 1844년에 보스톤으로 돌아온 뒤 선원 경험을 토대로 소설을 써서 문명을 얻었지만 작풍을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쪽으로 바꾸면서 독자들에게 외면당합니다. 이때부터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고민하던 멜빌은 생활고로 인해 작품활동에서 멀어졌고 1891년에 문단에서 거의 잊혀진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허먼 멜빌. [사진 성민엽]
멜빌 소설의 재평가는 1920년대부터 시작되었고 이후 멜빌은 미국 문학사의 가장 위대한 작가들 중 하나로, 그리고 그의 대표작 『모비 딕』은 가장 중요한 작품들 중 하나로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시간이 갈수록 단편소설 『필경사 바틀비』가 점점 유명해져서 이제는 『모비 딕』 못지않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바틀비라는 인물이 19세기적 인물이 아니라 20세기적 인물, 더 나아가서는 21세기적인 인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 큰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이 단편소설에 대한 해석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모비 딕』의 출판이 참혹한 실패를 겪은 뒤의 작가 자신의 심경을 투영했다는 해석부터, 바틀비가 일하는 월스트리트는 자본주의의 심장부이고 바틀비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소외된 개인이며 그의 단순 반복 노동은 인간성의 소모이고 “안 하는 편이 좋겠어요”는 소극적 저항이라는 가장 일반적인 해석, “안 하는 편이 좋겠어요”라는 말에 대한 난해한 철학적 해석들, 예를 들면 기존의 언어체계와 논리를 이탈한다는 들뢰즈의 해석, 무언가를 실행함으로써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소진해버리는 대신에 끝까지 ‘하지 않음’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잠재성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아감벤의 해석, 단순히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일해야 한다’는 강요와 ‘거부한다’는 반항 사이의 게임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지배 이데올로기를 가장 당혹스럽게 만든다는 지젝의 해석 등.

철학적 해석을 위한 해석
이 철학적 해석들에 대한 저의 솔직한 느낌을 말하면, 소설이 해석을 위해서 읽힌 것이 아니라 그들의 철학을 입증하기 위한 사례로 동원된 것 같습니다. 바틀비의 죽음에 대한 그들의 해석을 보면 이 느낌은 더욱 강해집니다. 예컨대 아감벤은 감옥에서 굶어 죽은 바틀비를 새로운 메시아로 봅니다. 먹는 행위조차 하지 않는 편을 택함으로써 생물학적 생명마저 중단시키는 바틀비는 세상을 변화시켜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정지시킴으로써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해석들 대부분은 그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많은 경우 작품 속의 어느 일부분에 대한 해석에 그치는 것 같고, 특히 이 작품을 알레고리로 읽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작품에 그려진 것이 무언가 다른 것에 대한 우의(寓意)라고 보는 것이죠.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런 해석 이전에, 먼저 작품에 그려진 것 자체를 좀더 자세히 읽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알레고리적 해석을 보류하고 먼저 작품 내적으로 읽으려면 바틀비의 모습을 병리학적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본 해석들도 이미 많습니다. 그렇게 보면 바틀비의 모습은 우울증 혹은 우울장애(depressive disorder)의 증상에 가깝습니다. “의욕 저하와 우울감을 주요 증상으로 하여 다양한 인지 및 정신 신체적 증상을 일으켜 일상 기능의 저하를 가져오는 질환”이 우울증입니다. 바틀비가 점점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은 우울증이 심해져서 정신적으로 붕괴되는 과정이라고 이해될 수 있겠습니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책 『피로사회』에서 철학자 한병철은 근대(모던)의 규율사회와 후기근대(포스트모던)의 성과사회를 구분하고 성과사회의 주요 질병으로 우울증을 지목합니다.

한병철의 설명을 옮기면,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고,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입니다. ‘~해서는 안 된다’가 여기서는 지배적인 조동사가 되며 그 부정성은 당위의 부정성입니다. 이에 반해 성과사회는 긍정성의 사회입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입니다. 이제 금지·명령·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이니셔티브·모티베이션이 대신합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이 광인과 범죄자를 낳은 데 반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바틀비는 19세기 중반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산 사람입니다. 그는 성과사회가 무엇인지 모르고, 오직 규율사회 속에서 살았습니다. 한병철도 이 점을 지적합니다. 멜빌이 묘사한 사회는 규율사회이고, 바틀비에게는 자신이 부족하다든가 열등하다는 느낌, 실패에 대한 불안 같은 자책과 자학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후기근대적 성과사회의 표징인 우울증의 증상과 바틀비의 증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병철은 바틀비가 보이는 것은 신경쇠약의 특징적인 증상이고 “안 하는 편이 좋겠어요”라는 말은 아무런 의욕도 없는 무감각 상태의 징후라고 말합니다.

규율사회 대치한 성과사회에서 각광
하지만 아직 규율사회에 살던 바틀비의 신경쇠약이나 성과사회의 표징으로서의 우울증이나 둘 다 탈진과 소진이라는 망가진 상태로 귀결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과사회에 살면서, 한병철의 표현을 사용하면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고 있는 우리에게 19세기 소설 속 인물 바틀비가 단순히 기괴한 것만이 아니라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소설은 바틀비가 전에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Dead letter office)에서 근무했었다는 소문을 언급하는 데서 끝납니다. 이 소문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작품 해석이 꽤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 사실 이 소문이 없어도 바틀비라는 인물의 완성에 별 지장은 없습니다. 또 소문은 소문일 뿐이고 화자도 믿을 수 없는 화자이어서 이 소문을 중시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소박하게 본다면 바틀비는 ‘죽은 편지’를 취급하는 일을 하다가 이미 망가진 상태가 된 채 월스트리트로 옮겨왔다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또 옮겨온 곳이 하필 월스트리트이어야만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제 말씀은 해석할 때 부수적이거나 지엽적인 것들을 지나치게 중시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뜻입니다.

『필경사 바틀비』의 중국어 판본(왼쪽). 원제목의 영어 단어 ‘scrivener’를 한국판의 ‘필경사’ 대신 ‘녹사’로 번역했다. 『필경사 바틀비』의 일본어 판본(오른쪽). 이 판본은 ‘서기’로 번역했다. [사진 성민엽]
마지막으로 작품 제목의 한국어 번역에 대해 재고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원 제목의 ‘scrivener’를 왜 한국에서만 필경사라고 번역할까요? 같은 한자문화권인 중국에서는 ‘서기원(書記員)’이나 ‘녹사(錄事)’로, 일본에서는 ‘서기(書記)’나 ‘대서인(代書人)’으로 번역했습니다. 필경(筆耕)은 전통시대에 ‘직업으로 글이나 글씨를 쓰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고 근대에 와서는 ‘등사 원지에 철필로 글씨를 쓰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변호사 사무실의 조수는 하는 일로 볼 때 필경사가 아니라 서기입니다. 한국에서 이 작품 제목의 번역에 필경사라는 한자어를 누가 처음 사용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정착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만약 적절하지 못한 맥락이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고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성민엽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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