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 급등이 세계 통화정책의 방향을 뒤흔들고 있다. 중동사태 장기화로 에너지 가격이 오르면서 물가 상승을 우려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금리 인하 기대를 거둬들이고 있다. 금융시장에서는 이를 두고 “유가가 피벗(pivot·통화정책 전환)을 되돌렸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금리 인하에서 인상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19일(현지시간)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일제히 금리 동결을 결정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이날 금리 동결을 발표했고 “중동 사태 여파로 경제 전망의 불확실성이 크게 확대됐다.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 위험이 동시에 존재한다”며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와 함께 올해 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기존 목표치(2%)를 크게 웃도는 2.6%로 상향 조정했다. 영국 영란은행(BOE) 역시 같은 날 만장일치로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특히 이전 성명서에 포함됐던 금리 인하 가능성 시사 문구가 삭제되면서, 정책 스탠스가 한층 매파적(통화 긴축)으로 기울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BOJ) 총재도 이날 금리 동결을 발표하며 “중동 상황이 일본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가 핵심 변수”라며 “물가 상승 파급력과 경기 악화 정도를 감안해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전날(18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동결 발표에 이어 다른 주요국 중앙은행이 일제히 금리 유지를 결정하자, 시장에서는 사실상 금리 인하 사이클이 종료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로이터통신은 “에너지발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지속될 경우 정책 긴축이 필요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변화의 중심에는 중동사태 장기화 속 연일 급등하고 있는 국제유가가 있다. 19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ICE 선물거래소에서 브렌트유 선물 가격은 장중 배럴당 119.13달러까지 치솟으며 120달러 턱밑까지 접근했다. 이후 상승폭을 일부 반납해 108.65달러로 마감했지만, 여전히 배럴당 100달러를 웃도는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다. 미국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서부텍사스산원유(WTI)도 장중 100달러를 돌파했으나 이후 상승폭을 되돌리며 96달러 선에서 거래를 마쳤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날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당국자들을 인용해 “4월 말 이후까지 공급 차질이 이어질 경우 유가가 배럴당 180달러를 넘어설 가능성도 있다”고 보도했다. 불과 한 달 내외의 단기간에도 추가 급등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의미다. 시장에서는 100달러 이상의 유가가 ‘뉴노멀’로 자리잡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특히 한국은 WTI가 아니라 브렌트·두바이 계열 원유를 중심으로 수입하는 구조다. 최근 글로벌 해상 원유 가격 기준인 브렌트유는 중동발 공급 불안의 영향을 직접 받으며 크게 상승한 반면, 미국 내륙 기준인 WTI는 상대적으로 상승폭이 제한되면서 두 유종 간 가격 격차가 10달러 이상 벌어지고 있다. 전쟁으로 지역별 공급과 수송 구조가 왜곡되는 상황에서 한국이 상대적으로 더 큰 비용 부담을 떠안는 구조다.
여기에 글로벌 긴축 흐름까지 겹치면서 환율과 금리에도 부담이 확대되고 있다. 환율 상승은 외국인 자금 이탈 요인으로 작용하고, 이는 채권시장 약세(국고채 금리 상승)로 이어진다. 실제 최근 국고채 금리는 전 구간에서 상승 압력을 받고 있다. 한국 국고채 3년물 금리는 지난달 말 3.04% 수준에서 안정세를 보였지만, 이달 들어 상승 흐름을 타며 3.4%대까지 올라섰다. 정부가 이날 ‘경기 하방 위험’을 8개월 만에 다시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재정경제부는 20일 ‘최근 경제동향’(그린북) 3월호에서 “중동 상황에 따른 국제유가 상승 등 지정학적 리스크 확대로 물가 상승, 민생 부담 증가와 경기 하방 위험 증대 우려가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 이날 원·달러 환율은 1500.6원에 마감하며 이틀 연속 1500원대를 기록했다. 원화 약세 흐름이 고착화하는 모습이다. 서정훈 하나은행 연구위원은 “그동안 시장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금리 인하 사이클이 본격화되면서 한·미 금리차가 점차 축소될 것이라는 기대가 반영돼 있었지만, 최근 유가 급등에 따른 인플레이션 재자극으로 글로벌 긴축 압력이 다시 커지면서 이런 기대가 빠르게 약화되고 있다”며 “금리차 축소 기대가 흔들릴 경우 원화 약세 압력이 추가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