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먼 미래, 머나먼 은하계에서
…. 인공지능(AI)은 2026년 3월 21일자 중앙SUNDAY 창간 특집을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1면 한쪽을 장식한 ‘AI 시대 인문학’을 펼칠 것이다. ‘우리 얘기였나’라고 ‘그들’은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AI가 인간처럼 정말 ‘생각’하는 존재라고 볼 수 있을까.
아주 가까운 오늘. AI의 질주에 가속도가 붙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AI 뉴스다. 심지어 이란 전쟁에도 AI가 깊이 개입하고 있다. 전 세계 시장 규모도 지난해 377조원에서 2030년엔 1800조원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AI로 일자리 지형 또한 바뀌는 모양새다. 지난달 AI 대체 직종으로 꼽힌다는 변호사·회계사 등 전문직과 과학·기술서비스업 국내 취업자 수는 1년 전보다 10만5000명 줄었다. 정보통신기술 분야에서는 4만2000명 감소했다. 인스타그램엔 #AI 태그만 5200만 개다.
역사는 과학기술 혁명 뒤에는 여지없이 인문학과 사상이 꽃피웠음을 보여준다. 인쇄술-르네상스-산업혁명-계몽주의-시민혁명이 이어졌고 반도체-컴퓨터-포스트모더니즘이 뒤따랐다. 1957년 최초의 AI 개념인 ‘퍼셉트론’이 나온 지 어언 70년. 2016년 알파고가 바둑에서 이세돌을 이긴 지 10년. 바야흐로 디지털 ‘혁명’, 인간이 공존을 피할 수 없는 AI 시대다. 그런 가운데 멀찍이 대척 지점에 서서 영향을 주거니 받거니 해온 과학기술과 인문학은 오늘날에도 융합을 모색 중이다. 김동우 KAIST AI철학연구센터장은 “인간 중심의 기술 발전과 가치 창출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AI 기술이 급가속하는 차에서 잠시 내려 인문학의 자리에서 AI를 바라보자. AI 시대의 인문학은 과연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위기의 인문학은 AI 시대 또 다른 위기를 맞고 있을까. 종교·예술과 함께 인문학을 이루는 어(語)·문(文)·사(史)·철(哲)로 나눠 살펴봤다.
━
인문·과학 능통한 다빈치처럼, 신르네상스맨이 AI 이끈다
이 비석 문장에서 시작했다. ‘摠戎使金公基厚愛民淸德善政碑(총융사김공기후애민청덕선정비).’
지난 14일 경기도 고양시 북한산 산영루 앞 비석거리. 등산객 세 명이 일제히 스마트폰을 꺼냈다. 생성형 AI인 챗GPT와 제미나이에게 물어봤다. “이 비석의 한문을 읽어줘.”
#어(語) 답: ‘崇政大夫金公之墓(숭정대부김공지묘)’. 현장에선 14자 한자를 가늠할 수 있는데 AI는 이렇게 8자로 엉뚱하게 읽었다. 비석 글자 중 ‘후’ 자가 조금 마모된 상태였고 ‘총융’에 비석 머리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긴 했다.
“이미지 텍스트를 생성형 AI가 감지 못할 수 있어요. 프롬프트(AI에 입력하는 문장)를 지속적으로 변경해 답을 얻어야 하는데, 인간이 아는 만큼 AI가 답할 수밖에 없어요. 단어나 문장을 정밀하게 쓰지 못하면 AI는 환각(hallucination)에 빠지게 됩니다. 인간의 지식과 언어 능력이 필요한 대목입니다.”(박성필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장)
“상대(AI)가 잘못 알려줬다는 걸 파악할 능력, 즉 메타인지가 인간에게 필요합니다. AI 시대엔 단순 문해력을 넘어 비판적 AI 문해력을 갖춰야 해요. AI의 능력을 과신하면 사회적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우동현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북한산성이 조선 숙종 때 완공되고 총융청이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군사 조직임을 알고 있던 등산객이 범위를 좁혀 프롬프트를 촘촘하게 다시 제시했다. AI의 대답. “아!”
언어를 비롯한 인문학이 뜨고 있다. 서울대 언어학과 입학 경쟁률은 2020학년도 6.9대 1에서 2026학년도 9대 1로 올랐다. 철학과는 같은 기간 9.92대 1에서 15.56대 1로 상승했다. 다른 주요 대학도 마찬가지다. 서점가에서도 인문학 수요가 갈수록 늘고 있다. 소설 분야의 지난해 판매 부수는 2022년보다 27%나 증가했다. 반면 이공 계열 서적은 감소세가 뚜렷하다.
〈그래픽 참조
〉
“좀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해 대세라고 하기엔 조심스럽지만 최근 컴퓨터·정보통신 관련 학과 경쟁률도 떨어지고 있어요. 어휘력과 문해력이 필요한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 뜨고 사유의 힘이 미래의 경쟁력이 된다는 인식이 퍼지는 걸로 보입니다. AI가 인문학을 불러낸 ‘AI 시대 인문학의 역설’이라고 부를 만합니다.”(사립대 언어학과 교수)
#문(文) 북한산 비석의 주인공은 총융사 김기후(1747~1830)다. 그가 산영루에 걸터앉아 시를 읊었다. ‘산영루 높은 마루 석간수 맑게 흐르고/북한의 첩첩 봉우리 도성을 둘러섰네/총융의 늙은 마음은 나라와 함께로다.’ 정확히는 등산객이 챗GPT에 100여 년 전 산영루 사진을 보여준 뒤 김기후가 돼 시조를 지어보라고 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때 저작권은 김기후(혹은 그의 자손)에게 있을까, 등산객에게 있을까, 아니면 챗GPT에 있을까.
“현재로는 ‘저작권은 아무에게도 없다’입니다. 저작권은 인간만을 대상으로 하니 AI는 빠집니다. 김기후나 그 후손은 이 시에 관여하지 않았고요. ‘사상과 감정’이 들어가야 권리를 인정받는데, 등산객도 그 정도는 안 했어요. 하지만 프롬프트 설계와 편집 등에서 창작적인 기여를 많이 할수록 그 인간에게 저작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정리되고는 있습니다.”(박성필 원장)
“기존 인간의 창작물 학습을 통한 AI의 창작에 대한 저작권도 논란입니다. AI가 창작을 통해 공익에 기여한다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핵심은 분배입니다. 논란 이전에 AI 학습 과정에서 창작물 사용에 대한 공정한 대가를 지급하도록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 그림 한 폭, 노래 한 곡으로 연명하는 작은 저작권자들이 소송을 제기할 수나 있겠습니까.”(최승재 세종대 법학과 교수)
‘AI 제작 작품은 응모할 수 없습니다.’ 지난해 신문사 신춘문예 공모전이나 창비 신인문학상 등 문학계에선 이 문장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띄었다. 그림·사진 공모전도 마찬가지다. “추후 발생할 저작권 문제 때문”이라는 게 주최 측 설명이다. 한 평론가는 “글을 쓰려면 검색이라도 해야 하는데 지금 누가 AI로부터 자유롭겠느냐”며 “문제는 그야말로 ‘정도의 문제’일 뿐이라 사회적·제도적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사(史) 1830년. 총융사 김기후가 사망했다. 탄핵받아 유배 간 지 3년 만이었다. 대리청정 중이던 효명세자도 급사하니 조정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세도정치가 극에 달했다. 같은 해 프랑스에선 1789년 대혁명 뒤 다시 혁명이 일어났다. 7월 혁명이었다. 이후 2월 혁명(1848)과 파리코뮌(1871)과 함께 이 4개의 사건은 ‘프랑스혁명’이란 이름으로, 근대 민주주의 발판을 마련한 역사로 남는다.
“프랑스혁명은 (1차) 산업혁명의 토대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전의 계몽사상이 물질적·사회경제적으로 뒷받침한 게 산업혁명이었고요.”(최갑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명예교수)
“그렇게 보면 역사에는 패턴이 있습니다. 과학기술 혁명과 사상적·인문학적 혁명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이젠 AI 시대입니다. 이런 혁명의 와중에 살아남는 건 기술도 있지만 인문도 많습니다. 마크 저커버그가 심리학에, 스티브 잡스가 선불교 등 동양사상에 빠진 건 이유가 있어요. ‘어떻게 만들 것인가’보다 ‘왜 만드는가’를 사유해야 하는 거죠.”(한지우 응용인문연구소장)
“하지만 역사적으로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에겐 간극이 있었어요. 기술 발전의 빠른 속도를 인문학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융합이라는 대안이 나온 겁니다. 사료의 데이터베이스화처럼 디지털 기술을 인문학 연구에 접목하는 방법은 많아요. 반대로 인문학 통찰을 디지털 기술 개발에 어느 정도, 어떤 방법으로 적용할지는 여전히 모호합니다. 상상력과 창의성이 필요한 단계죠.”(이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그래서 유발 하라리는 “AI 시대에 비판적 창의성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 소장은 “다빈치·미켈란젤로 같은 르네상스맨이 과학기술 혁명 중에 인문학을 꽃피웠듯 퍼지(Fuzzy·스탠퍼드대에서 인문·사회과학도를 일컫는 말)들은 이야기꾼이 돼야 AI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며 “많은 스타트업 창업자가 퍼지고, 퍼지가 바로 신(新)르네상스맨”이라고 강조했다.
#철(哲) “너처럼 비석 글자→인물 추적→산영루→총융사 김기후까지 가는 질문이 흔한 편은 아니야. 꽤 특이한 탐구 흐름이긴 해.” 등산객에게 챗GPT가 자기 생각을 전달했다. 과연 그들 AI는 인간처럼 ‘생각’하는가.
“인간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인간을 잘 모방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앨런 튜링) “입력 기호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규칙에 따라 반응하는 기계는 생각이 없다”(존 설)
“AI의 작동 방식 탐구가 필요하겠지만,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탐구가 선행돼야 하지 않을까요. 생각이란 능력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는 생각의 정의를 바꿔 AI에게 적용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그리고 AI가 꼭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까요. AI 시대 인문학이 할 일은 여전히 많습니다.”(정서현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AI와의 공존은 불가피하다.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그 가능성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인지, 또 의미 있게 활용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AI를 인간과 유사한 존재로 인식해 인간과 인간의 소통이 줄거나 공감 능력이 쇠퇴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요. 정책적·윤리적 전략을 마련하는 게 중요합니다.”(우동현 교수)
셰리 터클은 『외로워지는 사람들』에서 AI 시대의 사람들은 감정적 지원이나 안정감을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 인문학자들에게 물어봤더니 대답이 이랬다. “이미 확인하고 있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