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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정치에 붙잡아매게 한 것들 [왕겅우 회고록-청년기(5)]

중앙일보

2026.03.20 14:00 2026.03.20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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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정치로 기울어지게 만든 것들


나를 말라야 사람으로 키워내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과정이 아마 친구 사귀기였을 것이다. 베다 림은 많은 문예계 친구들 외에 첫 학생회의 명예서기 제임스 푸투치어리도 소개해 주었다. 제임스는 전쟁 중 인도 해방을 위해 인도국민군(INA)으로 참호전을 치른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런 전쟁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게 다소의 경외감을 품고 있었다.

내가 공산당 승리 직전에 중국에 있었다는 사실을 제임스가 알고는 내가 국민당 쪽인지 공산당 쪽인지 무척 궁금해했다. 양쪽 정부 모두 화교의 지지와 지원을 얻기 위해 경쟁하며 지역 중국인사회에 상당한 혼란을 일으키고 말레이 지도자들의 의구심을 불러오고 있었다. 말라야 중국인에게는 다른 국가의 민족주의자들과 한 편에 서는 것도, 말라야공산당이 지원을 바라는 중국과 손을 잡는 것도 장기적으로 좋은 길이 아니라고 나는 보았다.

애매한 내 태도가 제임스에게는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내 말을 액면대로 믿지 않고 내 진짜 생각을 알고 싶어 했다. 내가 정말로 정치에 장님이라면 진행 중인 거대한 투쟁들을 이해해 사람 구실을 하도록 교육해 주겠다고 나섰다. 내가 1학년 대표로 학생회에 들어가도록 밀어주기도 했다. 그는 교내에서나 교외에서나 제국주의의 사악함과 자본주의 착취의 가혹한 현실에 대한 비판 활동을 계속하다가 1951년 초 체포되었다.

이 체포로 활동가로서 제임스의 의지는 더욱 굳어졌다. 이듬해 석방되어 돌아오자 우리 중에는 그를 영웅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정치적 학생모임의 설립을 추진했는데, 대학당국은 비상사태가 막 선포된 시점에서 승인해 주지 않으려 했으나 그는 굽히지 않았다.

우리 주장인즉 대학에 정치학과도 없고 정치사상 강의도 없어서 우리의 장래를 학문적으로 공부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관한 최근 글을 찾아 읽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으나 우리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토론밖에 할 수 없었다. 대학 당국은 아마 식민 당국의 양해를 받아낸 듯 결국 사회주의클럽의 결성을 허락해 주었다.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경제 정책을 포함해 현실의 많은 일을 결정하는 것이 정치권력이라는 믿음을 나는 갖게 되었다. 일종의 사회주의자가 된 것이다. 식민정부가 행정력을 수단으로 부를 착취하는 모습을 보며 자본주의 경제의 보정 능력으로 일컫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믿음을 거두었다. 졸업반에서 경제학을 전공으로 삼을 생각도 해봤다. 흥미가 끌리던 정치학이나 사회학 같은 사회과학 분야들로 연결되는 과목이었다.

미국은 유럽국의 제국 해체는 도와주기도 했으나 냉전의 진행에 따라 열의가 줄어들고 탈식민 지역의 공산주의 이념 확산에 경계심을 품는 눈치였다. 여기서부터 미국은 극단적인 자본주의 옹호의 길로 방향을 돌렸다. 논쟁은 이념화되고, 나는 애초부터 제국주의 팽창을 가져온 것이 자본주의였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경제학 교수들은 비판적 사고와 함께 냉전의 논쟁을 학문 연구에서 배제할 것을 권장했다. 나는 종래의 식민지에 대한 경제적 착취가 중단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자본주의 기업의 지나친 이익 추구를 견제하는 노동조합을 지원하는 정책을 지지했다. 한편 변화를 위한 폭력의 사용에 관해서는 엇갈린 생각이었다.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 투쟁에는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지만 계급투쟁에서는 폭력이 배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콜롬보와 델리에서 만난 젊은이들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국가 건설에 관해 배울 기회가 학생들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믿음을 학생회 일을 하면서 갖게 되었다. 내가 학생회장이 되자 해외 활동도 시작했다. 1951년의 두 차례 방문국은 실론과 인도, 둘 다 내가 부러워하던 신흥 독립국이었다.

소학교 때 선생님 몇 분이 실론 출신이었기 때문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신할라족 다수파와 타밀족 소수파의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건국 과정에서 일어난 긴장에 관해서는 콜롬보 도착 후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대학 교정에서 참석한 모임들은 알고 보니 회의라기보다 나를 돌봐준 호스트인 신할라 법과생은 말라야도 실론과 같은 법체계를 갖고 있으니 독립 후에도 그 체계를 그대로 지키면 좋을 것이라는 믿음을 내게 나눠주려고 애썼다.

문학계 사정에 아직 관심이 있던 나는 지역 학생들의 높은 영어 수준에 탄복했다. 실론의 가장 유명한 시인 탐비무투가 시내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 호스트가 만날 자리를 마련해서 나를 콜롬보 항구 구역의 넬슨 호텔로 데려갔다. 탐비무투는 내게 시 한 수를 써달라고 부탁하고, 며칠 후 자기가 문예 에디터로 있던 〈실론 타임스〉 지에 실었다.

공유하는 반-식민 경험을 통해 영어라는 언어에 우리 사이를 맺어주는 역할만이 아니라 영국 문학과 나아가 전 세계 영어 문학을 함께 평가하고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역할도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해서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어떤 언어를 쓰는가 하는 현실과 민족(국민)문학의 이념 사이의 거리를 마닐라에서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을 때의 느낌이 탐비무투와의 만남을 통해 다시 떠올랐다. 실제로 얼마 후 신할라어가 스리랑카의 국어가 되었고 영어에 능통한 자프나-타밀인들은 그 나라에서 유리한 위치를 빼앗겼다.

우리의 정치적 장래를 모색하는 학생회 대표로 모인 자리였기 때문에 문학에 관한 생각은 곧 접어놓았다. 실론의 모임은 알고 보니 나중에 (1951년 12월) 델리에서 열릴 대회의 준비 성격이었다. 유엔 인도 학생협회에서 주최한 그 대회에는 우리 학생회의 집행위원 네 명이 대표로 선출되었다. 유엔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희망에 발판을 둔 행사였다. 인도 정부는 회의를 위한 강당 같은 시설과 공공숙소를 제공해 주었다.

우리가 묵은 메트카프 하우스 숙소는 인도행정부의 훈련원으로 쓰는 시설이었다. 행정부 간부 수준의 대접을 받은 것 같다. 5성급 호텔은 아니라도 황송한 대접이었다. 방에서 줌나 강이 내다보였고, 그 앞은 잘 가꾼 정원이었다. 겨울이라서 강물은 둑에서 멀리 떨어진 개울 같았다. 아침마다 여인들이 개울가로 빨래하러 줄지어 걸어가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콜롬보 회의와 달리 이번 회의는 정치를 당당히 앞세웠다. 유엔에서는 젊은 미국인 변호사 스티븐 슈웨벨을 대표로 보냈는데, 유엔 학생협회 창립자의 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 소장을 지낼 인물이다.) 슈웨벨의 이상주의에는 전염성이 있어서 많은 참석자가 유엔을 세계평화의 핵심 기관으로 지지한다는 선서를 했다.

어느 날 저녁 자와할랄 네루 수상의 연설에도 감명받았다. 청년들에게 기대하는 마음을 열정적으로 토로하는 것을 들으며 세계적 지도자 한 사람이 30개국 학생들을 위해 시간을 내준 데 모두 깊은 감사를 느꼈다.

새 친구 둘이 특히 격한 감동을 보였다. 하나는 푼잡 출신의 파키스탄 여학생이었는데, 가족이 라호레로 옮겨갈 때의 고난을 이야기하고 반대 방향으로 옮겨야 했던 사람들의 고난에도 공감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인도에 오기 전에 이 분단의 비극에 관해 읽은 것이 있기는 했으나 파키스탄 사람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또 하나는 이스라엘 청년이었다. 이집트 출생인데 하가나에 참여하러 팔레스타인으로 갔다가 폭약을 다루면서 폐가 손상되어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고 했다. 반식민주의와 홀로코스트 이미지의 맥락 속에서 이스라엘 친구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주장에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가장 깊은 인상을 내게 남겨준 사람은 로밀라 타파르였다. 역사학도 로밀라는 인도 고대사를 새로 공부해서 무굴제국 이전의 인도 역사를 우습게 여기던 많은 영국인 학자들의 태도를 바로잡을 결심을 토로했다. 그런 확신을 갖고 이야기하는 역사학도를 처음 봤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내 지식의 허술함을 탄식하기도 했지만 역사를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일어났다. 여러 해 후 런던의 SOAS에서 박사과정 학생으로 다시 만날 때 로밀라는 몇 안 되는 고대인도사 연구자 A.L. 배셤 교수 밑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내 마지막 정치적 학생운동, 사회주의클럽

1950년의 뜻하지 않은 마닐라 여행이 “말라야” 문학을 향한 내 뜻을 한 차례 잠재운 것처럼, 국제적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간 델리 여행은 나를 현실정치에서 돌려세우고 역사학 쪽에 관심을 키워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현대중국사 공부를 해나갈 수 없는 사정을 확인했을 때 2천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갈 엄두를 내는 데는 고대사에 대한 로밀라의 열정에서 얻은 용기가 큰 몫을 했다.

실론과 델리 여행에서 나는 지역의 정치적 변화에 관해 아는 것을 수시로 재점검할 필요를 깨달았다. 콜롬보에서 신할라족 불교도와 타밀족 힌두교도 사이의 긴장을 알아보았지만, 나중에 서로를 무자비하게 죽이러 나설 만큼 격화되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싱가포르의 마리아 헤르토그 폭동을 보고 종족 간 관계가 얼마나 불안한 것인지, 종족 사이 또는 종교 사이의 잔인한 전쟁이 얼마나 쉽게 일어날 수 있는지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델리 공항 도착 후 몇 마일에 걸친 난민촌을 지나가는 것은 매우 불편한 경험이었다. 인종적 민족주의를 비롯해 분노와 잔인성을 부추겨 보통사람들을 살인자로 만드는 어떤 종류의 배타주의에도 반대하는 내 입장은 갈수록 굳어졌다. 실론과 인도 방문은 내게 깊은 경각심을 일으켰다. 식민통치의 상처를 분명히 볼 수 있었고, 또 식민지에서 국가를 만들어내는 힘겨운 과업이 이제 겨우 시작되었고 엄청난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 멀리 있는 중국을 내 나라로 생각하는 중국인으로 키워진 사실이 심각하게 생각되었다. 말라야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하더라도, 종족이 민족정체성의 핵심이 된다면, 그 노력이 얼마나 보람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

긍정적인 면도 없지는 않았다. 신할라족 친구는 법치에 대한 믿음의 공유에 미래의 희망이 있다고 했고, 탐비무투의 삶은 영어의 문학적 유산이 우리의 다름을 넘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류의 장래에 대한 슈웨벨의 믿음에는 희망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깊은 뿌리를 이해하는 데 큰 가치가 있다는 로밀라 타파르의 믿음은 오래된 과거를 존중하는 든든한 마음을 내게 심어주었다.

귀국 후 나는 학생회 활동을 줄이고 졸업반에서 할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전공 결정에서 경제학과 역사학 사이에 아직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경제학 쪽이 유용한 길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경제현상 분석이나 경제정책 작성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변화에 대한 관심이 훨씬 더 컸다. 출신과 배경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가운데 역사 공부가 인간의 조건을 시간을 두고 살펴보는 열린 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를 학생운동에 붙잡아매는 일 하나가 남아있었다. 새 국가에 약속된 민주주의에 우리 자신을 준비시키는 방법으로 정치클럽 결성을 허가해 달라고 학교당국을 설득하려 애쓴 일을 앞에 적었다. 학교당국이 이 요구를 받아들이는 기쁘고 놀라운 일이 1953년에 일어났다. 그래서 사회주의클럽을 만들었고, 좌익활동의 체포 경력 때문에 부담이 있던 제임스 푸투치어리를 대신해 내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그때 나는 학문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논문 작성을 시작해 놓았고 정치 참여에 더 관심이 없었다. 학생들이 공개적으로 정치를 토론할 권리를 가져야 하고 그들이 새 국가의 목적을 체화하는 데 그 권리가 도움이 될 것을 나는 믿고 있었다. 회장을 맡아 클럽의 발족에 참여한 다음 곧 후배들에게 운영을 넘겼다. 나처럼 정치인이 될 생각 없이 사회주의 진흥 자체를 바라보는 학생이 많았으나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치에 직접 참여하려는 학생들도 클럽에 모였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1954년 클럽 간행물 〈Fajar〉 편집진을 체포한 강압적 조치가 역효과를 일으켜 여러 사람이 졸업 후 활동가의 길로 나서게 되었다. 그들을 도와준 사람 중에는 노동조합 지지자로 알려진 젊은 변호사 리콴유가 있었다. 경찰 조치에 분노한 클럽 회원들을 그가 열심히 도와준 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해 말 인민행동당(PAP) 결성에 많이 참여하게 된다. 1954년 중엽 내가 논문을 끝내고 영국으로 떠날 때까지 사회주의클럽이 정치적 의욕을 가진 학생들의 한 구심점으로서 평판을 누리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김기협([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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