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5호선 답십리역 1번 출구. 아파트와 상가가 빼곡한 서울의 여느 거리와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이 동네가 요즘 들썩인다. 파란의 주인공은 바로 ‘답십리 고미술 상가.’ 낡은 주상복합 아파트 상가에 골동품을 파는 고색창연한 가게들이 오밀조밀 밀집해 있는 곳이다.
지난 7일 답십리 고미술 상가를 찾았다. 고미술품 마니아거나 전문가가 아니면 감히 다가가기 힘든 풍모의 가게들이건만,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찰칵이며 핸드폰 사진을 찍는 이들로 상점 복도가 분주했다. 지금 답십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골동품 거리에 하루 1000여명 방문객
새로운 공간을 찾는 이들에게 오래된 답십리는 요즘 방문해야 할 1순위 장소다. 누군가는 답십리를 ‘제2의 을지로’ ‘제2의 성수’라고 말하기도 한다. 지난해 말부터 인스타그램·엑스 등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에 답십리를 태그한 게시물들이 늘기 시작했다. 16일 기준 인스타그램 #답십리 태그 게시물은 9만 6000개를 기록했다.
답십리 고미술 상가는 1980년대 청계천·아현동·황학동 등에 흩어져있던 고미술상이 한곳에 모여들면서 형성됐다. 답십리역 삼희아파트 2·3·5·6동과 인근 장한평역의 우송, 송화 빌딩 1층 상가를 아우른다.
고(古)미술. 말 그대로 오래된 미술품들을 취급하는데 흔히 골동품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수집 가치가 있는 오래된 서화·기물을 중심으로 국내선 주로 조선·개화기·일제강점기·1950~1980년대의 거래가 활발하다. 크게는 문갑·사방탁자 같은 큰 목가구부터 벼루·놋그릇·수저 같은 작은 물건들까지 그 품목이 매우 다양하다.
" “1000년 전 찻잔에 차 마셔보니까 어떠세요?” "
답십리에서 26년간 ‘예명당’을 운영하는 정영섭 대표가 이곳의 명물인 누빔 함을 보러 온 손님들에게 고려 시대 찻잔에 가루차를 내어주면서 말했다. 정 대표는 “지난해 대비 몇 배는 손님이 는 것 같다”며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옛 물건들을 직접 만져보고 가까이 볼 수 있는 게 매력”이라고 했다. 특히 예명당에서 직접 만든 누빔 함은 요즘 한 달 기준 20~30점이 팔려나갈 정도로 인기다.
사실 이런 변화는 꽤 최근에 생겼다. 지난해 1월 문을 열었다는 소품상점 ‘고복희’의 김성호 대표는 “문 열고 9월까지는 사람이 없어서 주로 어르신들이나 외국인들로 하루 4팀 정도 왔다”며 “하반기부터 사람들이 몰리더니 지난 주말에는 하루에 1000명 정도 방문한 것 같다”고 열기를 전했다.
공급자의 변화, 어려운 고미술품 ‘해석’ 해준다
답십리의 갑작스러운 인기에는 요즘 생긴 2세대 가게들이 큰 역할을 했다. 지난해 초부터 차례로 문을 연 ‘고복희’ ‘호박 포크 아트 갤러리’ ‘오브’가 그들이다. 주로 디자인·패션 업계 출신으로 고미술품에 젊은 감각을 입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브(of)는 성수동에서 팝업 플랫폼 프로젝트 렌트를 운영하는 최원석 대표의 새로운 아지트다. 본래 고미술품에 관심이 많아 한·두 점씩 수집하다가 지난해 11월 고미술품 큐레이션 상점 오브를 열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책가도를 콘셉트로, 검은색 선반 위에 최 대표의 취향을 반영한 고미술품을 오브제(정물)처럼 올려뒀다.
오래된 것이 주는 기쁨이라는 의미의 고복희는 김성호˙김지은 부부가 운영한다. 역시 골동품을 좋아해서 마냥 모으다가, 장한평역 인근에 '고복희 아틀리에'를 시작으로 지난해 1월 답십리에 소품 상점 ‘고복희’를 열었다. ‘호박 포크 아트 갤러리’는 패션 빈티지 숍 ‘수박 빈티지’ 김정열 대표와 동료들이 열었다. 오래된 목가구와 스니커즈를, 소반과 티셔츠를 나란히 둔 독특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오브’ 와 ‘고복희’는 토요일에만 운영한다.
이들의 특징은 고미술품을 새롭게 편집하고 해석한다는 점이다. 상점마다 복도까지 쏟아져 나올 정도로 빼곡한 골동품들은 다양한 물품을 한 번에 볼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초보자에게는 벽으로 다가가기 쉽다. 오브와 고복희, 호박 포크 아트 갤러리는 가진 모든 물건을 망라하기보다 여백을 두고 선별해 진열한다. 발굴의 부담이 아니라 발견의 재미를 살린다.
또한 이들은 골동품이 단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일상에 뒤섞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세운다. 오래된 좌불을 북엔드(책 지지대)로 쓰거나, 조선 시대 청사초롱에 천을 덧씌워 거실 스탠드로 개조하는 식이다. 우리나라 고미술품과 함께 유럽 빈티지 가구, 현대 작가의 작품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면, 내 일상에도 골동품 한 점쯤 더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미감의 변화, ‘코리안 빈티지’가 궁금해
공급자의 변화는 수용자의 변화를 전제한다. 한국적인 것이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한국의 고미술품을 새삼 들여다본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 것이 이렇게 현대적이었어?’라며 놀라곤 한다. 고려 시대 호리병에서 세련된 마블 무늬의 흔적을, 조선 시대 약장에선 미드 센추리 모던(1940~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유행한 인테리어 양식)의 반듯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동안 우리는 국산보다 외국산에 쉽게 아름다움의 기준을 두곤 했다. 우리 것보다 서양의 것이 더 세련됐다는 인식이다. 그런데 서양의 것을 오래 보다 보니 우리 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관점은 과거를 경험한 적이 없는 젊은 세대에게 더 유효하다. 김성호 고복희 대표는 “빈티지 가구 위에 둔 가야 토기를 보고 유럽이나 아프리카 토기인 줄 알았다며 놀라는 분들이 많다”며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고미술품은 완전히 새로운 영역”이라고 말했다.
7일 답십리 고미술 상가에 의뢰인과 함께 시장 조사를 나왔다는 공간 스타일리스트 박소현 씨는 “해외에 좋다는 디자인 가구·조명 다 써봤고, 이제 더 새로운 것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오게 됐다”며 “워낙 요즘 사람들이 유럽 빈티지에 익숙해서 한국 빈티지에 조금 더 쉽게 접근하는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말했다.
‘케데헌’이 불 지핀 문화 자부심
지난 15일(현지시각)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장편 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 등 2개 부문을 수상했다. 축하 무대에는 한복 입은 소리꾼과 사물놀이 악사, 갓을 쓴 무용수들의 전통춤 퍼포먼스가 올랐다. 수상 후에는 “한국과 전 세계 한국인에게 바친다”는 메기 강 감독의 소감이 나왔다. 한국 문화가 전 세계 주류 문화의 심장부에서 트로피를 거머쥔 사건이다.
답십리로 대표되는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의 근간에는 무엇보다 자부심이 깔려있다. 우리도 사실 좋은 것을 만들 수 있고, 우리의 옛것이 멋지고 근사하다는 새로운 발견이다. 최원석 오브 대표는 “따라 할 걸 다 따라 해보고 외국 것이 시큰둥해질 무렵, 문화 사대주의의 틀을 깬 결정적 콘텐트가 ‘케데헌’이었던 것 같다”며 “외국인들이 우리 문화를 저렇게 즐기고 ‘힙’하다고 해주는 데에서 어떤 확신을 본 게 젊은 세대들에게 의미 있지 않았나”라고 분석했다.
평소 한국의 옛 물건으로 집을 꾸미는 것을 즐긴다는 이연화 문화 기획자는 “자기 얘기가 중요해지는 시대에 다른 문화를 동경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가진 문화와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며 “국립중앙박물관의 굿즈가 흥행하고 고미술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우리 스스로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관심이 물건이나 상품으로 이어진 현상”이라고 해석했다.
b.이슈
비크닉이 흘러가는 유행 속에서 의미 있는 이슈를 건져 올립니다.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매력적인 공간을 탐색하고, 시대와 호흡해 성장하는 브랜드와 기업을 조명합니다. 비즈니스적 관점은 물론, 나아가 삶의 운용에 있어 유의미한 ‘인사이트’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