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장면에서 단종의 시신은 부패해 있었어야 했습니다.”
이호(60) 전북대 법의학교실 교수가 누적 관객 1395만을 넘긴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를 두고 한 말이다. 30년 넘게 4000여 구의 시신을 부검해 온 법의학자가 엄흥도(유해진 역)가 단종(박지훈 역)의 시신을 수습하는 장면에서 ‘옥에 티’를 발견한 것이다. 이 교수는 20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왕사남’은 감동적인 작품”이라며 “마지막 장면은 이 작품의 정서적 정점이지만 현실성 측면에선 치명적인 공백이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단종의 시신에 손대면 삼족(부모·형제·처자)을 멸한다는 국법이 있었고, 그로 인해 오랜 기간 시신이 방치됐을 가능성이 크다”며 “그렇다면 단정히 누운 왕의 모습이 아니라 시신은 부패가 진행된,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처참한 상태로 묘사되는 것이 역사적 상황에 더 부합한다”고 했다. “시신의 부패는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했던 시간의 두께와 공포의 정도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시각 언어이자 다수의 오랜 침묵 끝에 홀로 일어선 엄흥도의 결단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역설적 증거”라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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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인잡’서 장항준 감독과 인연
이 교수는 SBS ‘그것이 알고싶다’와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등에 출연하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왕사남’을 만든 장항준 감독과도 인연이 깊다. 장 감독이 방탄소년단(BTS) 멤버 RM(김남준)과 진행한 ‘알쓸인잡’에서 이 교수가 김영하 작가 등과 함께 고정 패널을 맡았다.
2024년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죽음 수업』을 펴낸 이 교수는 엄흥도의 행동을 기원전 441년 소포클레스의 고전 비극 『안티고네』와 연결 지었다. 『안티고네』에서 크레온 왕은 반역자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금지하는 법을 선포했으나 폴리네이케스의 누이 안티고네는 “그 명령은 제우스께서 내린 것이 아닙니다. 신들의 불문법은 영원하여 그 누구도 이를 어길 수 없습니다”라고 맞서며 오빠 시신을 거둬 장례를 치렀다. 이 교수는 “국가 권력이 만든 실정법과 인간의 도리(천륜·자연법)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개인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질문”이라며 “같은 맥락에서 엄흥도는 당대 질서에 맞선 조선 땅의 안티고네였다”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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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사람보다 침묵하는 사람들이 더 위험”
그는 “단종의 결말은 이미 알려진 역사”라며 “영화가 더 깊이 파고들었어야 할 지점은 엄흥도의 영웅성이 아니라 엄흥도가 될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수많은 이들의 두려움, 가족에 대한 책임, 권력에 대한 굴종 등 복잡한 내면의 지형도”라고 강조했다. 그래야 관객 스스로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나는 엄흥도인가, 아니면 침묵하는 군중인가’ 묻게 된다는 게 이 교수의 생각이다.
한마디로 ‘우리 안의 엄흥도를 찾자’는 게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라는 취지다. 이 교수는 “사회를 위험하게 만드는 건 악한 사람이 아니라 침묵하는 선한 사람들”이라며 “‘왕사남’을 본 뒤 기성세대인 나는 ‘교수로서 대학 문제에 무관심하지 않았나’ ‘학생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있나’ 반성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