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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과의 만남, 그리고 장모님에 관하여 [왕겅우 회고록-청년기(6)]

중앙일보

2026.03.21 14:00 2026.03.2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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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Pairing Lives / 짝짓기의 길

Meeting Margaret / 마거릿과의 만남

이제 돌아보면 말라야대학의 첫 3년은 기대감과 재미가 뒤섞인 시간이었다. 영문학 작품을 읽을 만큼 읽었고, 고전음악을 들을 만큼 들었고, 시도 좀 지었고,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 말라야에 관해 배우며 학생활동에도 참여했다. 주권 국민국가에 관련된 현실적 문제들도 살펴보았다.

그래도 영문학 쪽의 강력한 접점 하나가 남아있던 것은 마거릿 림핑팅(林娉婷)이었다. 그 사람을 앎으로 해서 내 삶이 달라질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를 만나면서 내 장래를 생각하는 데 초점이 잡혔다. 공무원도 좋은 길이라고 생각했으나, 내 적성이 꼭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끌리는 쪽은 배움과 가르침의 삶이었다. 마거릿도 내게 학문의 길을 권했다.

2학년 초에 문학이 내게 생각지 못한 축복을 가져다주었다. 신입생 몇이 낭만주의 작가들에 관한 토론회를 열면서 내게 사회를 부탁했을 때였다. 워즈워스의 시를 주로 다루는 자리였다. 마거릿이 이 일을 기억해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 사람이 윌리엄 워즈워스에 관한 발표를 할 때 처음 보았는데, 이름을 그런 식으로 쓰는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가 태어날 때 최신 로마자 표기법을 따른 것인데, 표기법이 얼마 후 바뀌어 ‘賡’ 자를 모두 ‘gung’ 대신 ‘geng’ 아니면 ‘keng’으로 적게 되었다. 이름 표기가 별나서 발표를 들으러 갈 흥미가 일어났다. 가보니 잘생긴 젊은이가 하는 이야기에 권위도 있고 깊이도 있었다. 나는 꽤 마음이 움직였지만 내가 신입생일 뿐이었고 그의 눈에 내가 들어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 후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1951-52년에 내가 학생회 임원으로 뽑혔는데 그해에 그는 학생회장을 지냈다.”

사실은 그 예쁜 여학생이 내 눈에 “들어왔다.” 말과 형용에서 민첩하고 예리하던 것이 기억난다. 내가 1년 상급반이었다. 마거릿은 영문학을 좋아하고 영어에 나보다 능숙했다. 세 살 아래고 학년도 아래였던 그는 자기 자신을 응원단의 일원으로만 여겼다.

베다가 또 하나 베풀어준 혜택이 얼마나 큰 것인지 당시에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는 내게 서양 교향악을 가르쳐줄 마음을 먹었다. 소장하고 있던 음반을 보여주었을 때, 연주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를 고르고 그 민족중흥의 정서를 설명해주었다. 내가 교향악에 백지인 것을 알고 교육에 나섰다.

그가 오케스트라 지휘자 입장처럼 여러 악기를 설명해주고 주제의 여러 변곡점에서 어느 악기가 들어오는지 짚어주는 것을 들으며 나는 경탄했다. 여러 주일에 걸쳐 베다는 차이콥스키 6번 교향곡(Pathetique)과 베토벤 5번 교향곡을 몇 차례씩 들려주었다. 내용을 너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 신기해서 지휘자가 되는 훈련을 받은 것 아닌가 물어보았다. 아니라고 했다. 귀가 좋고 기억력이 좋을 뿐이라고 했다. 그의 음반을 다 들었을 때는 서양문명의 한 부분이 내 마음을 온통 적시고 내 삶 속에 확실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내가 마거릿과 가까워지는 데 자신이 어떤 도움을 주는지 베다는 알지 못했다. 나는 한심한 음치였다. 부모님도 신경 쓰지 않았고 친구 중에 악기 다루는 아이도 없었고 앤더슨학교도 음악에 관심이 없었다. 1948년 난징의 본교 캠퍼스에서 지낼 때 아침마다 음악관 옆을 지나며 피아노, 바이올린 레슨이나 오페라 아리아 연습 소리를 들었으나 공연을 볼 기회는 없었다.

베다는 내 음악감상 수준을 높여줌으로써 이듬해 대학 교향악단의 바이올린 주자가 된 마거릿 림 양에게 좋은 인상을 줄 길을 만들어주었다. 덕분에 마거릿을 쫓아다닐 때 문학과 음악, 두 개 관심 분야를 공유하게 되었다. 문학에 대한 마거릿의 사랑은 움직이지 않았으나 내가 역사로 방향을 돌린 이유는 이해해 주었다. 처음 만날 때 생각보다 우리 배경에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차츰 알게 되었다.

마거릿은 제인 오스틴과 그 세대 영국 시인들에 관한 토론을 좋아하는 에쁜 여학생으로 눈길을 끌었다. 널리 존경받는 스승 고순툐의 지도를 받은 바이올린 주자로 싱가포르 청년오케스트라에서 연주했다. 대학에 오케스트라가 생겼을 때는 새로 온 화학 강사 레이슨 황과 나란히 앞줄에서 연주했다. 레이슨은 평생 바이올린 연주를 사랑했고 우리 부부의 좋은 친구가 되었다. 내가 그로부터 홍콩대학의 총장 자리를 물려받을 것을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름방학에 마거릿이 큰 병을 앓았는데, 메니에르 증후군이라는 이름의 바이러스질환이었다. 그 후 왼쪽 귀 청력을 완전히 잃었다. 마거릿 자신은 이 일을 이렇게 적었다.

“2학년이 시작되기 직전에 재난이 닥쳤다. 갑자기 병이 나고 귓속이 웅웅대다가 며칠 후 왼쪽 청력이 완전히 사라졌다. 의사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메니에르 증후군이라는 바이러스질환인데 노인들이 많이 걸리는 병이라고 했다.

아팠던 기간은 모두 3주일이고 그중 1주일을 병원에서 지냈다. 슬프게도 왼쪽 귀 청력의 상실은 확실한 일이었고, 귓속의 균형 신경에도 손상이 있어서 똑바로 걷지도 못하고 계단을 내려가다가 넘어지기 쉬웠다. 요컨대 균형감각이 약해진 나는 소리가 오는 방향을 판별할 수 없어서 바이올린도 켤 수 없게 되었다.

신경이 죽어버려서 보청기도 쓸데없었다. 내게 말하는 사람 쪽으로 오른쪽 귀를 돌려대는 습관이 생겼다. 왼쪽 사람 말소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자격지심이 심하지 않아서 어느 자리에서나 왼쪽에 앉은 사람에게 내게 하는 얘기를 듣지 못하는 것 같으면 옆구리를 찔러달라고 스스럼없이 부탁했다. 이 결함에 익숙해져서 지금은 별로 생각도 하지 않는다.”



Mother Tung / 미래의 장모님

마거릿은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병을 앓은 후 다른 일들로 관심을 돌려 곧 밝은 인생관을 되찾았다. 나는 그사이에 그 어머니를 만나고 묘하게 낯익은 듯한 이야기를 들었다. 루스 퉁이호(童懿和) 여사는 젊었을 때 국어(國語)를 배우려는 싱가포르 사람들을 가르치러 1930년경 상하이에서 왔다. 그리고 상하이로 돌아가 성요한대학 학생이던 림테한(林德翰)과 결혼했고 마거릿은 그곳에서 태어났다. 중일전쟁을 앞두고 페낭의 충림중학에 림 선생이 과학 교사로 초빙받자 가족이 함께 건너왔다. 마거릿은 어머니 이야기를 이렇게 적었다.

“어머니는 푸젠성의 사오우(邵武) 출신이었다. 그 세대 중국 여성으로는 특이한 방식으로 살았다. 18살 때 상하이의 대학에 보내달라고 부친 앞에서 단식투쟁을 벌였다. 상하이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던 오빠랑 같이 공부하러 가고 싶은 것이었다. 외할아버지는 기독교로 개종한 후 사오우에서 교회 여학교의 교장을 지냈고 어머니는 거기서 공부했다.

어머니 집안은 원래 북방 출신이었다. 퉁이란 성이 남쪽에는 없었다. 전해 듣기로 어린 나이에 결혼한 외할머니가 아들을 여럿 낳았는데 대부분 아기 때 죽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개종을 권하는 선교사에게 아내가 딸을 낳으면 개종하겠다고 하셨다 한다. 어머니가 태어나자 그 약속을 지키셨다. 외할머니는 열여섯이나 낳아 그중 다섯을 키워내셨다. 그때는 공공의료와 위생이 지금 같지 않아서 어린애 죽는 일이 흔했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의 개종 후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더 낳아 결국 2남3녀가 되었다.

어머니는 상하이로 가서 미국 침례교 선교단에서 만든 상하이대학(滬江大学)에 들어갔다. 영어를 전혀 모르던 분이 6개월간 캄캄한 오리무중에서 지내다가 어느 날 귀가 열리기 시작했다고 하셨다. 그때부터 영어에 능통해졌다는데, 문법에 맞지 않을 때가 많기는 했다. 대학 시절 어머니는 표준화된 국어의 확산 운동에 앞장서고 있던 후스에 대한 존경심에서 국어를 해외 중국인사회에 전파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20년대에는 국어가 중국 내에서도 보편적으로 쓰이지 않고 있었다. 외세의 위협 앞에 민족주의가 자라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인이 말하는 언어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일어났다. 읽고 쓰는 문자는 모든 교육받은 중국인이 2천년 동안 하나의 형태를 공유해 왔다. 이제 말하는 언어도 하나로 합칠 때가 되었다. 동서남북 모든 곳에서 같은 언어를 쓰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생각에 청년들이 얼마나 열광했을지 상상해 보라. 어머니는 열광했다. 졸업하자 싱가포르로 가서 남방 방언을 쓰던 사람들을 가르치는 국어학원에서 일하셨다.

이제 말하는 언어도 하나로 합칠 때가 되었다. 동서남북 모든 곳에서 같은 언어를 쓰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생각에 청년들이 얼마나 열광했을지 상상해 보라. 어머니는 열광했다. 졸업하자 싱가포르로 가서 남방 방언을 쓰던 사람들을 가르치는 국어학원에서 일하셨다.

식민세력은 교육에 많이 투자하지 않았다. 영국인은 도시마다 남학교 여학교 하나씩 세웠다. 영어로 가르치는 학교였다. 식민통치를 도와줄 하급 공무원이 그런 학교에서 양성되었다. 고등교육기관으로 래플스대학과 에드워드 8세 의과대학을 두었으나 학생 정원이 아주 적었다. 집안이 넉넉하고 아주 뛰어난 학생들은 영국에 공부하러 가기도 했으나 그 숫자는 더 적었다. 선교사들과 자선기관들이 나서서 영어로 가르치는 초등-중등 학교들을 더 세웠다.

중국인사회도 국어로 가르치는 사립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겅우 부모님과 내 부모님이 이 지역에 오게 된 사정이다. 내 아버님은 1937년 페낭의 충링중학(남학교)에 과학 교사로 채용되었다. 당시 중국인들은 그런 해외 취업이 일시적인 것으로 보고 국내 사정에 따라 돌아갈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어머니 얘기로 돌아와, 설립에 그분이 참여한 국어강습학교는 학생 모으는 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국어 배울 열성이 넘치는 학생이 1백 명이 넘었다. 대부분 어른이어서 강의를 저녁 시간에 했다. 아이들은 낮에 공부했다. 어머니는 영어를 할 수 있어서 영국식 교육을 받은 방언 사용자들과 편하게 소통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그들과의 관계를 잘 관리했기 때문에 1942년 싱가포르로 이사할 때 의지할 데가 있었다.”

일본 전쟁은 1941년에 동남아시아로 왔다. 마거릿 가족의 수난극은 우리보다 다채로웠다. 일본군의 페낭 도착 직전에 간신히 싱가포르로 피해 오면서 불과 두 달 안에 일본군이 영령 말라야를 석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싱가포르에서는 마거릿의 어머니가 전에 가르친 프라나칸 유지들과의 친교를 통해 가족의 안전을 확보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고 감리교회에 연줄이 있어서 교인 집단의 도움이 컸다. 중국어 교육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 새로운 분야에서 사업 수완을 펼쳤다.

마거릿의 부모님은 중국인 교육에 종사하면서도 영어로 읽고 쓰는 분들이었다. 아버지 짐 속에서 19세기 영국 소설 묶음을 찾아내 점령기 동안 읽기도 했다. 우리 사이에 비슷한 경험은 더 있었다. 마거릿도 점령기 동안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종전 후 들어간 감리교 여학교에는 영어 능력 덕분에 높은 학년으로 들어갔다. 그뿐 아니라 뛰어난 수학 선생님의 도움으로 케임브리지 졸업시험을 통과한 것도 나랑 비슷한 경험이었다.

나랑 전혀 다른 경험도 하나 있었다. 마거릿의 부모님은 자발적 선택으로 결혼했으나 행복한 결말에 이르지 못했다. 기질이 서로 다른 두 분은 아버지가 전쟁 후 타이완 가족에게 돌아가면서 헤어졌다. 싱가포르에 남은 3남2녀를 어머니 혼자 키웠다. 어머니는 사설학원을 열어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영국식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중국어를 배우고 졸업시험에서 중국어 과목을 선택하기 바라는 부모들이 많아서 그분 학원이 인기 있었다.

마거릿과 내 관계의 기초에 중국과 관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말라야대학은 중국 쪽을 바라보지 않고, 전 세계적 제국 사업에 참여하는 보람을 느낄 졸업생을 배출한다는 철 지난 목적을 가진 학교였다. 그래서 마거릿과 나에게는 영어와 영문학이 관계의 출발점이었다.



김기협([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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