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반도체 ‘초격차’의 주역이자, 한국 샐러리맨 연봉 역대 1위의 신화. 2017년, 그는 박수 칠 때 떠났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자신만의 취미에 전념할 법도 했지만 그의 선택은 달랐다.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이 베스트셀러『초격차』에 이어 최근 『다시, 초격차』(쌤앤파커스)를 펴냈다. 지난해부터는 기획재정부 중장기전략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미래 세대를 위한 구상도 내놓고 있다. 이유를 묻자 그는 짧게 답했다. “너무 답답해서 그랬다.” 지난 16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오렌지플래닛에서 그를 만났다.
Q : 굳이 책을 쓰지 않아도 되는 위치 아닌가. 동기가 궁금하다.
A : (잠시 말을 고르더니) 너무 답답했다. 왜 아무 변화도 없을까 싶었다. 나는 이미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수혜를 받은 세대다. 반면 지금 젊은 세대는 가장 큰 피해자다. 사회에 불합리한 제도가 많다보니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일부는 해외로 나가 한탕을 노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업인으로서 메시지를 내고 변화를 시도해보고 싶었다.
Q : 한국에서 CEO(최고경영자)가 책을 연달아 펴내는 일은 흔치 않다.
A : 학교 다닐 땐 모범생이었지만, 회사에선 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는 쪽에 가까웠다. 삼성에서도 비교적 다른 방식으로 경영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시키는 일을 잘하는 모범생 타입이라기보다 “틀리면 어떻습니까. 한번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쪽이었다.
Q : 삼성에 입사하려면 ‘틀리지 않는 법’을 익혀야 하는 것 아닌가.
A : 당연히 틀리는 게 좋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에만 익숙해진 사람은 시키는 일은 잘해도, 스스로 해야하는 일은 잘 못한다. 목표가 명확했던 과거 ‘패스트 팔로워’ 시기에는 최고의 전략이었을지 모른다. 추격자에게 실수는 용납되지 않으니까. 허용된 것만 가능한 ‘포지티브 시스템’은 낭비를 최소화하는 데 강점이 있다. 우리가 선진국까지 온 것도 그 덕분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전략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Q : 틀리는 게 두려워 위임을 못하는 리더도 많다.
A : 집에서 가족 누군가 냉장고 식품 유통기한을 지키는지 하나하나 검사하는 사람이 있나. 집에서도 안 하는 일을 회사에서 하면 안 된다. 직급이 올라가면 그에 맞는 일을 해야 한다. 그걸 안 하고 관리에만 매달리는 건 좋게 보면 불안 때문이고, 나쁘게 보면 지식과 정보의 독점이다. 미래가 아니라 부하와 경쟁하는 셈이다. 패스트 팔로워 시기에는 그런 관리자가 경영자가 됐지만, 지금 시대에는 좋은 리더가 되기 어렵다.
Q :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전 세계가 혼란스럽다.
A : 새로운 시대에는 제도를 제대로 설계하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다. 다른 나라도 모두 헤매고 있다. 그래서 지금이 기회다. 제도는 남보다 조금만 잘해도 된다. 골프로 치면 상대가 더블보기(Double Bogey, +2타)를 하면 나는 보기(Bogey, +1타) 만 해도 이기는 것과 같다. 미국이라고 완벽하겠나. 다만 금지된 것만 제외하고 가능한 ‘네거티브 시스템’을 잘 갖췄기 때문에 앞서가는 것이다. 입시를 비롯해 50년 넘게 유지된 포지티브 중심 제도를 네거티브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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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 실패 패널티 너무 크게 부과”
한국 사회가 ‘퍼스트 무버’가 아닌 ‘패스트 팔로워’의 관성에 머물러 있다는 권 전 회장의 진단은, 최근 수퍼사이클에 올라탄 반도체 산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삼성전자는 AI 수요에 힘입어 사상 최대 실적을 새로 썼지만, 한때 고대역폭메모리(HBM) 경쟁에서 뒤처지며 자존심을 구겼다. 그래픽처리장치(GPU)처럼 데이터 처리와 연산·제어를 담당하는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는 여전히 한국이 도전자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Q : 최근 대기업들은 실적은 좋지만 미래 먹거리 고민이 크다.
A : 왜 그렇게 많은 기업이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 시스템이 실패에 대한 패널티를 너무 크게 부과하기 때문이다.
Q : 삼성전자가 HBM 경쟁에서 뒤처지며 ‘반성문’까지 썼다. 실패 패널티의 영향인가.
A : HBM은 전영현 당시 메모리사업부장(현 삼성전자 부회장)과 함께 발굴한 미래 먹거리였다. 문제는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손을 놓은 것이다. 자녀가 시험 성적이 떨어졌다고 ‘오늘부터 공부하지 말라. 돈이 아깝다’고 하는 부모가 어디 있나. 리더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Q : 비메모리 반도체를 미래 먹거리로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다.
A : 모두가 명문대를 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희망사항에 불과할 때가 많다. 비메모리를 제대로 하는 나라는 미국 외에는 거의 없다. 다른 나라는 왜 안될까, 이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Q : 왜 어렵다고 보나.
A : 메모리 반도체의 목표물이 고정된 ‘양궁’이라면, 비메모리는 움직이는 표적을 맞히는 ‘클레이 사격’과 같다. 메모리는 읽기·쓰기라는 목표가 명확하다. 반면 비메모리는 어디서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다. 20년 전 스마트폰 등장으로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가 필요해질 것을 누가 예상했나. (카피 능력이 뛰어난) 패스트 팔로워가 (창조가 본질인) 비메모리 분야에서 강점을 발휘하기 어려운 이유다.
Q : 패스트 팔로워 관성에서 벗어나려면.
A : 좋은 리더는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이건희 회장은 한번도 지시한 적이 없다. ‘매출 더 올려야지’ 같은 말은 정말 10년 동안 단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이 회장의 질문은 언제나 ‘미래는 어떻게 될 것 같나’ 이거였다. 이익 얘기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단, 그 얘기만 하는 조직은 평생 발전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