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알파인 스노보드 간판 ‘배추보이’ 이상호(넥센윈가드)가 월드클래스의 자존심을 지켜냈다. 올 시즌 마지막 월드컵을 금빛으로 장식하며 동계올림픽 메달권 입상 좌절의 아쉬움을 다소나마 씻어냈다.
이상호는 22일 독일 빈터베르크에서 열린 국제스키연맹(FIS) 스노보드 알파인 월드컵 남자 평행회전 빅 파이널(결승)에서 오스트리아의 크리스토프 카르너에 0.56초차로 여유 있게 승리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상호가 레이스를 군더더기 없이 마친 반면, 카르너는 두 번째 기문을 통과하려다 넘어져 일찌감치 승부가 갈렸다. 이상호는 앞서 치른 예선을 전체 1위로 마친 데이어 결선에서도 연전연승 끝에 포디움 맨 꼭대기에 오르며 올 시즌 최종전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했다.
이상호가 올 시즌 FIS 월드컵에서 우승한 건 동계올림픽 직전에 출전한 로글라(슬로베니아) 대회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포디움에 오른 건 지난달 28일 크르니차(폴란드) 월드컵 은메달에 이어 세 번째에 해당한다. 통산 성적 기준으로는 5번째 우승으로, 역대 한국인 스노보더 중 최다 우승 기록 보유자가 됐다. 하프파이프의 최가온(세화여고)이 월드컵 무대를 4차례 제패해 2위다.
이번 대회는 이상호가 자비를 들여 출전했다. 이번 시즌 대한스키협회의 국제대회 지원 프로그램이 동계올림픽까지로 종료된 상황에서 출전비용 지원은 물론, 코칭스태프 및 지원스태프의 도움 없이 홀로 월드컵 무대에 나섰다.
당초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을 끝으로 시즌 일정을 마무리하려던 이상호가 남은 7차례의 월드컵에 추가로 나서기로 결심한 건 올림픽에 대한 아쉬움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이번 시즌 이상호의 성적표는 드라마틱하게 요동쳤다. 시즌 초반엔 다소 부진했다. 보드를 교체하고 새로운 장비 세팅에 적응하느라 초반 7차례의 대회에서 단 한 번도 포디움(메달권 입상)을 달성하지 못했다. 같은 기간 TOP 10에만 두 차례(모두 9위) 이름을 올려 간신히 체면치레를 했다.
다행히 동계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급격한 상승 곡선을 그렸다. 올림픽 직전 열린 두 번의 월드컵에서 4위에 이어 1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리며 자신감을 회복했다. 앞서 이상호를 메달권 입상 후보에서 제외한 국내·외 언론이 부랴부랴 그의 이름과 얼굴을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다. 8년 전 평창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며 대한민국 설상의 역사를 새로 쓸 당시의 긍정적 기대감이 대표팀 안팎에 피어올랐다.
하지만 기대했던 환호는 없었다. 4년을 준비해 도전한 동계올림픽 무대에서 ‘16강 탈락’이라는 믿기 힘든 결과를 내는데 그쳤다. 대표팀 동료이자 맏형 김상겸이 깜짝 은메달을 따내 부담감을 일부 덜긴 했지만, 여전히 깊은 좌절감이 그를 뒤덮었다. 스노보드대표팀 관계자는 “이상호가 올림픽 이후에도 ‘알파인 종목의 간판선수로서 기대에 부응하지 못 했다’는 자책감에 힘들어했다”고 증언했다.
올림픽 이후 월드컵 일정을 추가로 소화한 건 지난 4년간의 노력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려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시즌 최종전 금메달과 함께 이를 입증했다. 올림픽 우승을 놓친 아쉬움도 일부나마 덜 수 있게 됐다.
우승 직후 이상호는 FIS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시즌을 부상 없이 마치는 게 가장 큰 목표였는데, 좋은 성적까지 거두며 마무리하게 돼 행복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소셜미디어(SNS) 계정에는 “응원해주신 모든 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지만, 아쉬움도 많이 남는 시즌이었다”면서 “여러분의 응원이 있었기에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고 인사했다.
알파인 스노보드는 기술과 경험이 조화를 이루는 30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하는 종목이다. 1995년 생으로 갓 30대에 접어든 이상호는 앞으로 최소 3차례 이상 동계올림픽 무대를 더 밟을 기회가 남아 있다. 이번 대회 우승으로 확인할 수 있듯이 이상호는 이미 기술적으로는 최상위 레벨로 발돋움했다. 경험을 추가해 어떤 환경에서도 일정한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되면 명실상부한 월드클래스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스노보드대표팀 관계자는 “최상의 컨디션을 갖추고도 목표한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 한 이번 동계올림픽이 장기적으로는 이상호에게 ‘입에 쓰지만 몸에 좋은 약’으로 작용할 것”이라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