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감 환율은 이미 1500원 선을 넘어섰다. 고유가 충격 속에 환율과 시장 금리가 함께 오르는 ‘3고(高)’ 복합 위기가 현실화했다. 기준금리를 인상하면 내수가 흔들리고, 묶으면 원화 약세가 심화되는 ‘트릴레마’ 속에서 정책 선택지는 좁아지고, 결국 소비자 부담만 커지고 있다.
22일 서울외국환중개에 따르면 이달 16~20일 주간 평균 원·달러 환율은 1493.29원으로, 2009년 금융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준까지 치솟았다. 이달 평균도 1483.4원으로 외환위기 당시(1998년 3월·1488.87원)에 근접했고, 올해 평균 환율 역시 1461원으로 1998년 이후 가장 높다.
주간 종가 기준으로 이틀 연속 1500원대를 유지하며 환율 ‘기준선’이 올라섰다는 해석이 나온다. 은행 창구 환율은 1530원대, 공항 환전소는 1570원까지 올라 체감 환율은 이미 1500원을 넘어섰다.
이번 환율 상승은 달러 강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같은 기간(16~20일) 유로 등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가 1% 하락하는 동안 유로(1.34%), 엔(0.31%), 파운드(0.90%) 등 주요 통화는 강세를 보였지만 원화는 0.48% 하락했다. 고유가에 따른 달러 수요와 최근 5주간 약 29조9000억원 규모 외국인 순매도가 동시에 작용한 결과다.
외환당국은 구두 개입과 시장 미세조정 등으로 변동성 완화에 나서고 있지만, 환율 수준 자체를 끌어내리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외화보유액은 약 4100억 달러로 대응 여력은 충분하지만, 장기 개입은 오히려 시장 불안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환율 향방은 결국 중동 전쟁의 확산 여부에 달려 있다. 장용택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전면전으로 확대될 경우 환율 상단이 1550원까지 높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박형중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현재 상황에서는 환율 상단이 1600원까지도 열려 있다고 봐야 한다”며 “미국 금리 인하 기대가 약화되면서 달러 강세 압력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금리는 이미 시장에서 먼저 반응하고 있다. 한국 국채 3년 만기 금리는 2월 말 3.041%에서 이달 초 3.42%까지 상승했고, 20일에도 3.41%를 기록했다. 주택담보대출(고정형) 기준 금리로 활용되는 은행채 5년물 금리는 2월 27일 3.572%에서 이달 20일 3.907%로 뛰었다. 회사채 3년물 금리도 3.997%까지 올라 기업 자금조달 비용이 빠르게 비싸지고 있다.
중동발 고유가로 인플레이션 우려가 다시 커지면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와 유럽 주요 중앙은행들이 금리를 동결하면서도 ‘매파적’ 기조를 강화하고 있다. 연내 금리 인하 기대는 사실상 사라졌고, 일부에서는 추가 인상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이런 환경에서는 국내 시장금리도 상방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리기에는 부담이 크다. 미국(3.5~3.75%)과 한국(2.5%) 간 기준금리 차는 상단 기준 1.25%포인트까지 벌어진 상태다. 금리 인상은 환율 방어 카드로 활용할 순 있지만, 자금 조달 비용 상승으로 유동성이 위축되는 부작용이 따른다. 5대 은행 연체율은 2월 말 기준 0.46%로 상승하고 중소기업 연체율이 0.67%까지 뛰는 등 금융권 부실 신호가 확대되고 있다.
정부가 ‘전쟁 추경’을 추진하고 있지만, 국채 발행 확대는 오히려 시장금리 상승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연구본부장은 “한국은 내수 부담이 커 금리를 올리기도, 내리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환율 안정, 금리 정책, 금융 안정을 동시에 달성하기 어려운 ‘트릴레마’ 구조가 현실화되고 있다. 결국 부담은 소비자에게 전가되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환율이 1% 오르면 소비자물가는 약 0.04%포인트 상승 압력을 받는다. 환율이 1500원을 넘고 국제유가가 배럴당 110달러를 웃도는 상황이 이어지면 물가 상승 압력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가계 부담도 빠르게 늘고 있다. 시장금리 상승으로 대출 이자가 늘고, 해외 지출 비용도 급증하고 있다. 금리와 유가 부담이 동시에 커지는 가운데 환율까지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 가계와 기업의 부담은 복합적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전쟁이 장기화되면 공급 차질이 현실화될 수 있다”며 “가격이 오르는 것은 감내할 수 있지만, 공급이 막히면 경제 자체가 멈출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은 유가 상승에 따른 전형적인 공급 충격으로 스태그플레이션 압력이 나타나는 국면”이라며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려야 하지만 경기 침체 부담으로 정책 선택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전쟁이 장기화하면 물가와 환율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며 정책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복합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