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충남 서산 대산항에 ‘이글 벨로어호’가 입항했다. 원유 200만 배럴을 실은 이 배는 지난달 26일 이라크 남부 알바스라 항구를 출항해 이틀 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했다. 이란의 해협 봉쇄 선언에도 속도를 높여 사실상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마지막 유조선이 됐다. 이 배가 싣고 온 원유 200만 배럴은 HD현대오일뱅크가 정제한다.
HD현대오일뱅크 대산 원유 정제 시설의 처리 능력은 일 최대 52만 배럴. 이글 벨로어호가 들여온 원유는 4일이면 모두 처리된다. 이틀 앞서 들어온 ‘베리 럭키’호의 200만 배럴을 합해도 약 일주일 치 정도다. 이후엔 언제 호르무즈 해협발 유조선이 입항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봉쇄가 시작된 지 3주 지난 지금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공급이 뚝 끊기는 절벽 시점”이라며 “이젠 정유사들이 여유분도 많이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진짜 위기라는 말이 나온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한 이란에 최후통첩을 날리고, 이란은 강경 대응을 예고하면서 전쟁이 길어질 전망이다. 22일 업계에 따르면 정유사들은 호르무즈 해협 외 원유 수급 방안을 찾느라 혈안이다. 국내 정유사들이 수입하는 원유의 약 70%는 중동산이고, 이 중 90% 이상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기 때문에 대안을 찾기는 쉽지 않다.
우선 중동산 원유를 우회해서 들여오는 방안이 거론된다. 에쓰오일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작하는 송유관을 통해 홍해 연안의 얀부(Yanbu) 항구에서 원유를 수급받았다. 사우디의 아람코가 에쓰오일의 지분 63%를 가진 대주주이기 때문에 대응이 빨랐다. 업계에 따르면 아람코는 장기계약을 맺고 있는 다른 국내 정유사에도 얀부항을 통한 원유 수급을 제안했다고 한다. HD현대오일뱅크, GS칼텍스 등도 홍해를 통한 원유 수급 방안을 타진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UAE)에서는 오만만의 푸자이라(Fujairah) 항구로 이어진 송유관을 활용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우회 원유는 확보할 수 있는 양이 적다는 점이다. 업계에 따르면 얀부항에 연결된 송유관은 하루 약 500만~700만 배럴, 푸자이라 항구 쪽은 하루 150만~200만배럴 정도만 수송할 수 있다. 하루 최대 900만 배럴 수준으로는 기존 2000만 배럴이 통과하던 호르무즈 해협 물량을 대체하기엔 역부족이란 게 업계 우려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4월부터는 가동률을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하게 될 것”이라며 “4월 말, 5월부터는 진짜 상황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비중동 원유 확보도 충분하지 않다. 미국·멕시코·캐나다·호주·동남아 등에서 원유를 수급하지만 양이 적고 중동산 대비 원유 활용도가 높지 않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통상 중동산 원유를 베이스로 비중동산을 블렌딩해 정제해왔다. 중동산 원유가 없으면 비중동산 만으로는 원활한 제품 생산이 어렵다”고 했다.
중동에서 나프타를 공급받는 석유화학사는 실제 공급을 줄여야 할 상황에 놓였다. 석화사들의 나프타 재고 분량은 통상 2주치다. 나프타 절반은 국내 정유사에서, 절반은 수입하는데 수입분 중 중동 물량이 절반이 넘는다. 여천NCC 등 석화사들은 가동률을 크게 낮추는 식으로 버티는 중이다. 방현지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나프타 공급 변동은 기초유분과 합성수지·플라스틱 등 후방제품 생산비 및 수급에 구조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 짚었다.
통상 유가가 오르면 정유사는 재고 가치가 상승하고 마진이 개선돼 이익 증가를 기대할 수 있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호르무즈 이외 루트에서 구하는 단기 현물 물량 가격이 폭등했고, 운송비와 보험료 등이 올라 원가 부담이 커지면서 정제 마진이 크게 낮아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부가 석유 최고가격제에 이어 수급 조정 명령이나 수출 제한 조치까지 검토한다고 밝히면서 정유 업계 긴장도는 더 높아지고 있다.
다만 석화업계는 지금까지 공급 과잉으로 피해가 이어진 만큼 생산만 이어갈 수 있다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에틸렌·부타디엔 등 석유화학 제품의 가격이 급등해 이전보다 가동률이 낮아져도 마진은 개선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카타르, 사우디 등이 이란의 공격으로 석화 설비 일부를 가동 중단했고, 중국도 이란산 원유 수급에 차질을 빚으면서 당분간 석화 제품 공급 과잉이 해소될 여지가 생겼다. 전우제 KB증권 연구원은 “봉쇄가 지속하면 5월부터는 부르는 게 값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