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이란에 48시간 이내에 호르무즈 해협을 개방하라고 최후통첩성 메시지를 보내며 동맹 규합을 촉구하는 가운데 이란은 해협 통과통항권을 빌미로 ‘동맹 갈라치기’에 나서고 있다. 정부는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규탄하는 각국 정상의 공동성명에 합류하면서도 선박 통과를 위해 이란과 소통하고 있다고 밝히는 등 ‘호르무즈발 동맹 딜레마’에 고민이 깊어지는 기류다.
트럼프는 21일(현지시간) 소셜미디어(SNS) 글을 통해 “만약 이란이 지금부터 48시간 이내에 아무런 위협 없이 호르무즈 해협을 완전히 개방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가장 큰 발전소를 시작으로 이란의 각종 발전소를 공격해 초토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날에는 기자들과 만나 한국, 일본, 호주에 대해 “그들은 (호르무즈 해협에) 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들이 ‘아니오(No)’라고 말했을 때 저는 조금 놀랐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그들에게 ‘예(Yes)’라고 말해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앞서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네덜란드·일본·캐나다 등이 주도해 19일(현지시간) 발표한 정상 공동성명에는 “이란군에 의한 호르무즈 해협의 사실상 폐쇄와 무장하지 않은 민간 상선, 석유·가스 등 민간 인프라에 대한 공격을 가장 강력한 표현으로 규탄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재명 대통령도 20일 이에 동참하는 등 22개국 정상이 이름을 올렸다.
다만 성명은 이란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행동 지원 등은 거론하지 않았다. 직후 트럼프가 48시간 통첩을 한 건 이런 ‘립 서비스’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불만의 표시일 수 있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트럼프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 나아가 이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동맹에 기대한 부분이 있는데 협조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해협은 사용하는 국가들이 경비해야 한다고 밝힌 만큼 이란뿐 아니라 동맹에 대한 압박 의도도 담긴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이란은 이런 틈새를 파고드는 모양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알리 무사비 국제해사기구(IMO) 이란 대표는 22일 반관영 메흐르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호르무즈 해협은 이란의 적과 연계된 선박을 제외하고 모든 선박에 개방돼 있다”고 밝혔다. 무사비는 “이란 정부와의 보안·안전 조율을 거치면 통과가 가능하다”며 IMO와 협력 준비가 됐다고 덧붙였다.
아바스 아라그치 이란 외무장관도 전날 일본 교도통신 인터뷰에서 같은 뜻을 밝히며 일본 선박의 통과를 “허용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란의 잇따른 메시지 발신은 트럼프의 호르무즈 연합 요청에 응하지 말라는 압박으로 볼 여지가 크다.
주목할 건 정부가 교도통신 보도 직후 “정부는 중동 정세 동향을 면밀히 주시하면서 우리 국민 보호와 에너지 수송로 안전 확보 방안을 모색해 나가고 있다. 이란을 포함한 관련국들과 다각적으로 소통해 오고 있다”고 밝힌 점이다. 미국으로부터 전투함 파견을 요청받는 중에도 이란과 협의를 진행 중이었다는 사실을 공개한 셈이다. 에너지 수급에 대한 국내적 우려를 의식한 것으로 보이는데, 통상적인 원론적 반응보다는 더 나간 것이라 외교가에서는 이를 다소 이례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0일 미 당국자들을 인용해 이란이 이날 오전 인도양에 있는 디에고 가르시아 섬에 있는 미·영 합동기지에 탄도미사일 2발을 발사했다고 보도했다. 영국이 미국의 이란 공습 초반에 해당 기지 사용을 바로 승인하지 않아 트럼프가 불만을 표했다는 점에서 이 역시 동맹 내 균열을 노린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와 관련, 동맹이 하나로 움직이지 않고 개별 대응에 나서는 ‘각자도생’ 기류는 더 완연해지는 양상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나토 유럽사령부는 지난 20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이라크의 나토 병력이 태세를 조정해 모든 인력을 중동에서 유럽으로 안전하게 재배치했다”고 밝혔다. 이란 사태로 바그다드 주둔 지역이 공격 대상에 포함되자 철수한 것으로, 이번 전쟁에 개입될 여지를 최소화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트럼프가 거론한 발전소 등 ‘에너지 인프라 공격’도 동맹국이 군사 지원을 주저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다수의 민간인 피해가 예상돼 국제형사법적 책임 공방으로 번질 수 있는 만큼 맹방(盟邦)이 지원을 꺼릴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이 주시하던 ‘다카이치 스탠다드’가 뚜렷한 성과를 보장할 수 없다는 점도 정부의 우려를 키운다.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리는 지난 19일(현지시각) 워싱턴 미·일 정상회담 직후 브리핑에서 730억 달러(약 109조원) 규모의 제2호 대미 투자 프로젝트를 발표했지만, 호르무즈 지원 압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지난해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물을 담은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에 따른 대미투자도 진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한국으로썬 꺼내기 힘든 카드일 수 있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장은 “이란 사태는 여타 전쟁보다 국제 안보를 책임진다는 공감대 형성은 어렵지만, 동맹에 거는 미국의 기대는 한층 커진 딜레마적 상황”이라며 “이러한 차이를 어떻게 메울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미국은 물론 이란과 소통하면서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