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말은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라”이다. 그보다는 ‘딱 하루씩만 잘 살아라’, 그런 말이 훨씬 좋다. 제목에 끌려서 본 영화 ‘사람과 고기’를 보다가 이런 말이 마음에 남았다. “사는 것도 귀찮고 죽는 것도 귀찮고.” 이런 생각이 들 때는 오히려 꽃피는 봄날일지 모른다. 나는 여행을 많이 한 편이지만 아직 이란에 가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란이라는 나라의 이름은 내게 낯익다. 내 나이 스물일곱 1984년에 파리에서 전시를 끝내고 돌아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파리에서 사는 이란 국적의 사람이 보낸 서툰 영어로 쓴 편지였다. 그는 이란의 옛 이름 페르시아라는 단어를 쓰기 좋아했다.
어릴 적 이란은 먼 신비로운 나라
전쟁 끝나도 삶에 흔적 오래 남아
귀찮다고 느낄 수 있는 게 행복
“당신의 그림을 보고 나는 오랜만에 사랑을 느꼈습니다. 내 소원이 있다면 당신을 만나 내가 못 본 당신의 모든 그림들을 보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아름다운 페르시아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한 스무 통 받은 것 같다. 그 시절 나는 그를 미친 외국인이라고 생각하고 답장을 하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그는 내게 끝까지 버티라는 용기를 준 최초의 외국인이었다. 만일 그가 이란의 부호라서 내 그림을 몽땅 사서 실어 갔다면 나는 무엇이 되어있을까? 다행히도 그는 부호가 아니라 가난한 시인이었다. 대체로 나는 돈이 많은 사람보다는 나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무거운 걸 들어주고 힘들고 어려울 때 같이 있어 준 가난한 내 친구들을 기억한다.
이란이라는 나라는 어릴 적부터 내게 세상에서 제일 먼 신비로운 나라였다. 화랑을 경영하던 어머니의 절친은 그녀의 연인과 함께 먼 나라 이란으로 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녀의 연인이던 왕세자 이구 선생은 대한제국의 황족이며 건축가였다. 그들은 70년대 이란 여행을 자주 다녔다. 금으로 만든 신비로운 보물들이 찍혀있는 그림엽서와 우표들은 그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난 지금도 나의 소장품으로 남아있다.
세월이 흘러 사촌 언니 부부가 살던 터키에서 한참 머물렀을 때 나는 이슬람사원에서 울려 퍼지는 코란을 듣는 걸 좋아했다. 그 시절 내게 코란은 낯설고 신비한 음악이었다. 훗날 본 다큐 영상에서 8년이나 지속되었던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부르는 이란 국영방송이 생각난다. “젊음이여 장렬히 순교하라. 오직 하나뿐인 우리의 신 알라를 위하여.”
영상 속에서 자식과 남편을 잃은 검은 히잡을 쓴 여인들이 우는 풍경은 까마귀들의 풍경처럼 강렬하고 스산했다. 전쟁은 언제나 시작보다 끝내기가 어렵다.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개인의 삶에 계속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자기 대신 전쟁 나간 스무 살 동생을 찾으러 아버지는 온 세상을 다 뒤지고 다니셨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동생을 찾으러 갔다가 역시 전쟁 나간 고모의 남편을 찾아 돌아왔다. 고모는 돌아온 남편이 냄새가 나서 싫다고 박대하다가 헤어졌다.
그 냄새가 전쟁의 냄새는 아니었을까? 우크라이나에 파병된 북한군은 1만5000명에 사상자가 4700명이라 한다. 조선인민군의 군사 규정에는 적에게 절대로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 포로가 되기 전 영예로운 자폭을 권한다. 김정은 장군 만세를 외치며 자폭하는 소년병의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며 시간을 되돌리는 기분이다. 포로가 되어 살아남는다는 건 사형이거나 무기징역의 죄이다. 2026년도에 이런 세상이 존속한다는 걸 믿을 수 없다.
북한에는 우울증이라는 단어가 없다고 한다. 대신 신경쇠약증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우울증은 정상인의 범주에, 신경쇠약증은 질환의 범주에 속하는 어감이다. 우울할 권리가 있는 장소에서 우울감을 가끔 느끼며 살아가는 것도 행복일지 모른다. 살아있는 것도 귀찮고 죽는 것도 귀찮을 때, 어린 북한군 포로의 초상을 보면서 그 귀찮음마저 사치로 느껴진다.
볼펜이 나오지 않는 순간까지 우리는 잉크가 떨어질 거라는 생각을 안 한다. 진짜 세상의 몰락이 온다 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설마 하다가 죽을 어리석은 우리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