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으로 비닐과 플라스틱 원료가 되는 나프타 등 석유화학 제품 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일부 영세업자와 시민 사이에선 ‘비닐·플라스틱 제품 대란’ 우려까지 확산하고 있다. 정부는 단기간 수급에 문제가 없단 입장이지만, 중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단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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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 대란 우려에 생선 담을 봉지 2만장 미리 사”
23일 서울 마포구 망원월드컵시장에서 만난 생선 가게 주인 최모(42)씨는 “비닐 가격이 오를 거란 뉴스를 보고 어제 검은색·흰색 비닐 총 2만장을 사서 쟁여뒀다”며 “6개월~1년 치 분량인데, 생선은 비닐봉지가 없으면 장사를 접어야 해서 미리 산 것”이라고 말했다.
일회용품을 일상적으로 쓰는 카페·식당 등 자영업자들도 일회용품 가격 걱정에 속을 앓고 있다. 서울 종로구에서 개인 카페를 운영하는 이모(56)씨는 “2000원짜리 저가 커피 장사를 하는데, 지금 분위기면 현재 100원대인 플라스틱 컵값이 200원까지도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매출 10%가 컵값인 셈”이라며 “컵값이 오르기 전에 미리 더 사 놓고 싶지만, 도매상들이 물량이 없다며 판매량을 조절하고 있어 그마저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플라스틱 용기를 많이 쓰는 배달 전문 업체들은 용기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배달대행 업체 부릉은 이날 자사 이용 자영업자들에게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차질로 플라스틱 원료 재고가 2주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며 “용기·빨대·숟가락 등 조기 품절 및 가격 인상이 예상되니 미리 재고를 확보해두길 권한다”고 안내 문자를 보냈다. 서울 영등포구에서 중식당을 운영하는 강모(66)씨는 “포장 용기 하나당 400원 정도인데 만약에 500원이나 600원으로 오르면 부담이 엄청나다”면서 “배달비만 해도 4000~5000원 수준인데 최소주문비 1만1000원짜리 팔면 남는 게 없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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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국서도 “약 포장지 값 오를까 우려”
약국에서도 불안감이 감지됐다. 약을 담거나 포장하는 용기와 포장지가 모두 나프타를 원료로 하는 플라스틱이라서다. 중소 포장재 업체 대표 오모(50)씨는 “폴리에틸렌(PE) 가격이 최근 10% 이상 올랐다”면서 “화장품 병, 약 포장지 등 가격을 인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서울 서대문구에서 대형 약국을 운영하는 박모(53)씨는 “포장재 도매상에게 약 포장지값이 오를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다른 것도 아니고 약인데, 포장지값이 비싸진다고 아무거나 쓸 수도 없어서 다음번 주문 땐 받을 수 있는 최대치를 사두려고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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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량제 봉투 매대 비었다’ SNS 글
비닐 대란 불안은 일부 시민들로 확산하고 있다. 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사용자는 이날 편의점의 텅 빈 종량제 쓰레기봉투 매대 사진을 올리며 “누가 정말 쓰레기봉투를 싹 쓸어갔다. 어디서 사야 하나”라고 적었다. 다른 사용자는 “난 불안한 게 질색이라 생리대랑 생필품 위주로 미리 쟁여두는 중”이라는 글을 올렸다.
종량제 봉투를 중심으로 시민 불안이 확산하자 서울시는 이날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열어 종량제 쓰레기봉투 생산·유통 과정을 점검한다고 밝혔다. 서울 한 자치구 관계자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단기적으로는 비축분이 있어 종량제 공급 부족까지는 발생하지 않을 것 같다”면서도 “우리뿐 아니라 다른 구들도 종량제 봉투 비축분을 정확히 확인 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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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프타 가격 급등, 비닐·플라스틱 수급 비상
시민들과 자영업자들이 비닐 대란 공포에 빠진 배경엔 석유화학제품인 나프타의 가격 급등이 있다. 원유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나프타는 플라스틱·합성섬유·합성고무 등 각종 공산품의 원료로 쓰인다. 국석유공사 유가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1월 첫 주 배럴당 56.9달러(약 8만6000원)이었던 나프타 국제가격은 지난주 129.7달러(약 19만6500원)로 약 127.9% 급등했다. 게다가 국내 소비량의 40∼45%가 수입되는데 이 중 54%는 호르무즈 해협을 거친다. 중동 분쟁으로 해협이 막히면서 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여기에 전쟁으로 인한 금융시장 불안으로 달러 대비 원화 값도 급락하면서, 우려는 더 커졌다. 해외에서 전부 수입하는 나프타는 원화 값이 급락하면 가격이 더 치솟을 수밖에 없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 대비 원화 값은 주간 거래 종가(오후 3시 30분) 기준 전 거래일보다 16.7원 내린(환율은 상승) 1517.3원으로 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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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감면, 대체재 확보 검토해야”
현장과 전문가들은 중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전쟁 장기화 조짐에 원자재 가격 상승이 본격화되면서 경제적 부담이 앞으로 일반 시민들과 자영업자로 확산할 수 있어서다. 14년 차 비닐 도매업자 김모(68)씨는 “국내 석유화학 대기업에서 이미 비닐과 플라스틱 원재료 관련 가격을 인상하기 시작했다”면서 “시차를 두고 도매업자와 소매업자로 부담이 전이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분쟁이 길어지고 있는 만큼 현지 공급망부터 물류·보험 등 여러 인프라가 회복되기 위해선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며 “석유와 관련 제품의 공급망 문제 장기화에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공급망 문제라고 하더라도 피해는 결국 영세 자영업자까지 이어진다”며 “세금 감면부터 대체재 확보 등 정부가 여러 정책을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