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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줄면 "불안" 늘리면 "학원비 부담"…꼬여가는 고교학점제

중앙일보

2026.03.23 13:00 2026.03.23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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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새 학기를 맞은 서울 강남의 A고는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학교 측은 당초 2학년의 과학 등 일부 선택과목에서 지필고사를 기말 1회만 치르겠다고 안내했다가, 1주일 뒤 방침을 번복하고 중간·기말 모두 치를 예정이라고 공지했다.

학부모 커뮤니티에선 논쟁이 이어졌다. “기말 한 번으로 한 학기 내신이 결정되는 건 불안하다”며 중간고사를 원하는 의견과 “선택과목 내신까지 다 챙겨야 하는데, 사교육비가 너무 부담스럽다”며 기말만 치르는 게 낫다는 주장이 맞붙었다. 급기야 학부모들 사이에서 “인근 학원들이 학부모로 가장해 학교에 민원을 넣어 방침이 바뀐 것”이란 ‘의혹’까지 제기됐다.

이에 대해 학교 측은 중앙일보에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줄이려는 취지로 시험 횟수 축소를 검토했으나, 이렇게 되면 수행평가가 오히려 학생들에게 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방침을 변경했다”면서 “학원의 압력에 휘둘렸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선택과목의 시험 횟수를 놓고 빚어진 이 같은 소동을 두고 교육계는 입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고교학점제의 현주소를 보여준다고 보고 있다. 현재 고2 학생이 치르는 2028학년도 대입에선 일반선택 과목 대부분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에 출제되지 않는다. 서울 강남 소재 일반고 교사 B씨는 “자녀를 수능 위주 전형으로 진학시키려 하는 부모는 대체로 수능 공부 시간을 더 벌기 위해 지필고사를 축소하자는 의견이지만, 학생부전형 등을 염두에 둔 부모는 한번 시험(기말고사)으로 등급이 결정되는 걸 반대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수능 안 보는 선택과목, 시험 횟수까지 갑론을박

지난 1월 13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국가교육위원회 앞에서 교사노동조합연맹,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소속회원들이 고교학점제 행정예고안 개선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특히 수능을 통해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많은, 이른바 ‘정시형 고교’에선 수능에 출제되지 않는 선택과목의 지필고사를 축소하는 추세다. 실제로 휘문고 등은 2학년 1학기 일부 선택과목의 중간고사를 치르지 않기로 확정한 상태다.

서울 소재 일반고의 진로진학부장 교사 C씨는 “학부모 입장에서는 다른 학교 아이는 수능 준비에 전념하는데, 우리 아이만 수능에 도움 안 되는 공부에 시간을 쏟고 사교육까지 받아야 하니 불만이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험 횟수를 줄여달라는 민원이 들어온다”고 말했다. 그는 “(고교학점제라는 )제도는 학생의 진로와 선택권을 강조하는데, 정작 대입 현실은 수능과 내신 등급이라는 잣대에 묶여 있으니 벌어지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정보, 경제수학도 다 학원 의존 “월 250만원 사교육비”

선택과목을 고르는 기준 역시 고교학점제의 도입 취지인 진로 탐색 대신 내신 등급 확보를 위한 눈치 싸움으로 변질했다는 지적이다. 현재 고2 학생의 일반 선택과목 내신은 공통과목처럼 1~5등급의 상대평가 방식으로 학생부에 기재된다.

때문에 진로가 연관 깊은 과목도 수강생이 적어 상대적으로 높은 등급을 받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수강을 포기하는 분위기다. 서울 서초구의 고교생 학부모 이모(50)씨는 “주변을 보면 작년 학교의 선택과목 수요조사 때 수강 신청 인원이 적어 1등급(상위 10% 이내) 확보가 어려울 것 같은 과목은 포기하는 대신 더 쉽게 1등급을 받을 수 있는 수강생이 많은 과목으로 이동하는 사례가 많다”고 전했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대입 유불리에 따라 내신 경쟁이 세분화되면서 사교육 시장은 한층 팽창하는 분위기다. 종로학원이 지난해 고1 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8.1%가 과목 선택의 최우선 기준으로 대입 유불리를 꼽았고, 관련 상담을 받은 10명 중 6명(60%)은 사교육 컨설팅 업체에 의존했다.

선택과목인 ‘정보’ 성적을 위해 자녀에게 주 1회 과외를 시키는 고2 김모(17)군의 어머니는 “선택과목도 모두 상대평가라 내신 부담이 큰데, 학교 수업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마땅한 인터넷 강의도 없어 과외를 시킨다. ‘경제수학’ 같은 선택과목을 듣는 애 친구들도 다 사교육에 의존한다”고 전했다. 그는 “이러다보니 한달 사교육비로만 월 250만원 넘게 쓰고 있다”고 했다. 최근엔 대형 입시학원들도 선택과목 단과반 등을 잇따라 개설해 이런 수요를 흡수하려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엇박자가 나는 교육 제도와 정보 부족의 틈을 사교육의 공포 마케팅이 파고들고 있다고 본다. 정미라 경기 진덕고 교사(교육정책디자인연구소 공동소장)는 “대입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지필고사 횟수나 과목 선택 등에 대해 사교육 업체들이 학부모의 정보 부족을 이용해 불안감을 부추기고 있다”며 “교육 당국이 2028학년도 대입 가이드라인을 조속히 확정하고, 각 학교도 입학사정관 초청 등을 통해 공교육 안에서 입시 정보를 제공하는 채널을 적극 가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연.이보람([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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