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천만 영화’ 반열에 올라서며 극중 배경인 계유정난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커졌다. 계유정난은 1453년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보좌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2년 뒤 수양대군은 왕에 오른다.
마침 계유정난을 다룬 창극이 무대에 올랐다. 지난 19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개막한 ‘보허자 : 허공을 걷는 자’다.
‘보허자(步虛子)’는 송나라에서 고려에 전래한 이래 조선 시대까지 연주된 궁중음악이다. 도교에서 허공 위를 거니는 신선처럼 불로장생하길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이 작품은 ‘허공을 걷는 자’라는 한자의 뜻만 가져왔다.
영화와 달리 안평대군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세종대왕의 셋째아들이자 수양대군의 친동생인 그는 뛰어난 예술가이자 후원자로 주변에 따르는 인물이 많았다고 한다. 수양대군을 견제하려는 여러 인물도 안평대군과 가까웠다. 그러다 계유정난 이후 안평대군은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한다.
이 작품은 안평대군이 사사되고 27년 후의 이야기다. 안평대군의 딸 ‘무심’이 안평대군의 꿈을 담은 그림 ‘몽유도원도’를 찾아다니는 여정을 담았다. 무심은 폐허로 된 옛집 수성궁에서 안평대군이 아꼈던 화가 ‘안견’과 안평대군의 애첩 ‘대어향’을 만난다. 이들은 모두 계유정난으로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인물들이다. 여기에 안평대군을 오롯이 기억하는 ‘나그네’가 끼어든다.
‘보허자’는 안평대군이 살아남아 나그네로 떠돈다는 상상을 더 했다. 안평대군의 죽음을 증명한 기록이 없다는 데서 착안했다. 나그네는 죽은 수양대군의 혼령과 붉은 줄로 연결돼 있는데,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작품은 비극이후 남겨진 인물들의 슬픔과 무상한 권력, 그리고 화해를 담았다. 안평대군의 흔적을 모두 없앤 수양대군이 ‘몽유도원도’만은 사찰에 보관했다는 설정은 비극에 얽힌 두 형제간 화해의 매개다. 작품에서 수양대군은 영화 ‘관상’에서 등장하는 야심만만한 인물이 아닌 병들고 나약한 노인의 모습이다.
창극답게 몽유도원도를 소리로 그려낸 듯한 음악이 돋보인다. 거문고와 25현 가야금, 생황 등 선율 악기 위주의 반주로 서정성을 극대화했다. 여기에 배우들의 애달픈 소리가 관객의 심금을 울린다. 국립창극단 간판이었다가 올해 퇴단한 뒤 이번에 객원 배우로 참여한 김준수와 유태평양은 각각 나그네와 안견을 맡아 농익은 소리를 선보였다. 수양대군 역의 이광복, 무심 역의 민은경, 대어향 역의 이소연 등이 맡았다.
이 작품은 지난해 초연 당시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재연인 이번 공연에선 작품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 무심의 존재감을 키우는 등의 변화를 줬다.
이번 공연 역시 티켓 구하기가 만만치 않다. 공연이 끝난 이후 커튼콜 때 객석에서는 아이돌 무대나 일부 뮤지컬에서나 볼 수 있는 ‘대포 카메라’가 등장하기도 했다. 오는 29일까지 관객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