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가 녹아내리고 있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17년 만에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돌파했다. 지난 23일에는 1517.3원을 찍었다.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여겨진 ‘1달러=1500원’이 무너진 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2008년 세계금융위기 때뿐이다. ‘1달러=1500원’이 뉴노멀이 될 것이란 걱정과 두려움이 고개를 든다.
치솟는 환율은 또 다른 기억도 소환한다. 범인 찾기다. 지난 연말 정책 당국은 뛰는 환율을 위기의 경고음으로 받아들이기보단 환율을 끌어올리는 주범 찾기에 몰두했다. 그 레이더망에 제대로 걸린 게 해외 주식 투자에 나선 서학개미와 국민연금이었다. 국민연금은 ‘전략적 환헤지’로 환율 방어의 최전선에 동원됐고, 서학개미는 달러 확보를 위해 ‘국내 시장 복귀 계좌(RIA)’를 내건 정부의 ‘국장 귀순 포섭 대상’이 됐다.
이번 환율 급등 국면에는 중동 전쟁이라는 확실한 주범이 있다. 그러니 지난번처럼 국민연금과 서학개미 때리기로 치닫지는 않겠지만, 환율 급등을 야기했다는 꼬리표는 내내 따라다닐 것 같은 분위기다. ‘외환 시장 교란의 죄’를 제대로 물게 된 건 국민연금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연금의 외화채권 발행을 내용으로 한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국민연금법상 기금 재원은 연금보험료와 기금운용수익금, 적립금, 공단의 수익지출결산 잉여금이다. 부채 발행으로 기금 재원을 확보할 수 없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 확대 과정에서 국내 외환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려 ‘달러 빚’을 낼 길을 열었다. 이 내용을 담은 개정안 입법 예고엔 반대 의견이 줄줄이 이어졌다.
국민연금은 시장의 고래다. 지난해 말 기준 국민연금 적립금은 1458조원에 이른다. 이 중 해외 투자액은 861조원(59.06%)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국민연금 등은 407억 달러(약 61조원)어치의 해외 주식을 사들였다. 시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큰 손이 맞다. 한국은행과의 통화스와프도 해외 시장 투자를 위한 국민연금의 외환 수요가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려 방어선을 구축한 조치였다.
여권, 환율 급등 주범 낙인 찍고 국민연금 외화채 발행 법안 발의 이자 부담, 자금 조달 비용 늘 듯
국민연금이 수익률 제고를 위해 해외 투자를 늘리는 건 막을 수 없다. 정부 입장에서 늘어나는 국민연금의 외화 수요로 환율이 흔들리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멀쩡한 적립금을 놔둔 채 외화채권을 발행해 해외 투자를 하라는 건 적절치 않다. 국민연금을 불리기 위한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민의 노후 자금을 정부가 환율 관리를 위해 제멋대로 쓰겠다는 이야기와 같은 말이라서다.
당장 문제는 이자다. 빚을 내면 돈의 값(이자)을 줘야 한다. 국민연금이 외화채권을 발행하는 건 돈을 빌려주는 사람(채권자)에게 일정한 이자를 지급한다는 의미다. 국민연금 외화채권 이자는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이나 국책은행의 외화채권과 비슷한 수준이 될 것이라는 게 시장의 일반적 시각이다. 외평채 금리는 연 4% 안팎으로 상황에 따라 가산금리가 붙는다.
만약 국민연금이 400억 달러(약 60조원)의 해외 투자금 마련을 위해 외화채권을 발행한다고 가정하면 연간 이자만 약 16억 달러(약 2조4182억원)에 이른다. 게다가 국민연금 입장에서는 4% 수준의 이자를 채권자에게 지급하면서도 목표 수익률까지 낼 수 있는 투자 상품을 찾아야 한다. 채권 발행으로 늘어난 추가 자금의 적절한 투자처를 찾는 것도 고심거리다. 이래저래 운용 위험과 부담이 커지는 셈이다.
한국 경제가 금리 상승의 부메랑을 맞을 수도 있다. 국민연금이 한국계 외화채권 시장에 뛰어들면 정부와 기업의 자금 조달 비용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구축 효과다. 국민연금이 돈을 빌리려 국책은행 등과 경쟁하며 채권금리는 더 뛸 수 있고, 그 여파는 기업의 회사채 금리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대미 투자 기금 채권 발행도 예정된 만큼 정부가 감당해야 할 금리 상승 압력은 더욱 커지게 된다.
일각의 지적대로 국민연금 외화채권 발행분을 국가 채무에 포함해야 할지도 논란의 여지를 남긴다. 나랏빚이 6500조원을 넘어선 상황에서 국가 채무가 아니라도 일반정부부채로 계상할 경우 국가신용등급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뛰는 환율은 한국 경제에 대한 우려의 신호다. 재정과 통화 정책에 대한 점검과 방향 전환 등 경제 전반의 개선 노력이 수반돼야 원화가치 하락 압력을 줄일 수 있다. 국민연금을 ‘달러 빚쟁이’로 만들어가며 환율 방어에 나서는 건 미봉책일 뿐이다. 무엇보다 환율 관리에 나랏돈도 아닌 2160만 가입자의 노후 자금인 국민연금을 담보로 잡히겠다는 발상이 기막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