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부터 정점까지 함께해왔을뿐더러 스트리밍에 특화한 유튜브를 놔두고 왜 넷플릭스였을까. 넷플릭스 관계자는 내 궁금증에 이렇게 답했다. 이 짧은 문장 안에 묵직한 함의가 다 담겨 있다. 바로 문화권력의 이동이다.
한국시각으로 지난 21일 밤 8시 넷플릭스가 전 세계 190개국에 생중계한 'BTS 컴백 라이브:아리랑'은 과거 문화 주변부였던 서울이 이제 "중심지로 떠올랐음"(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을 만천하에 선언하는 무대였다. 지난 2022년 10월 부산콘서트 이후 3년 4개월 만에 완전체로 돌아와 누구의 인정도 갈구하지 않고 그저 즐기며 춤추고 노래한 BTS는, 더 이상 뭘 증명할 필요 없는 그냥 BTS였다. 그날 광화문에서 직관해보니 시간·공간, 이걸 중계하는 넷플릭스(플랫폼) 대형 화면이 뿜어내는 현장 공기만으로도 'BTS 컴백 라이브:아리랑' 이전과 이후로 달라진 세상의 시선이 확 체감됐다. 이날 세상의 중심은 서울이었다.
세계를 한국 시각에 맞춰 연결
넷플릭스, 제작비 대고도 IP 넘겨
오겜·케데헌 때 갑을관계 역전
역사·현대 어우러진 서울 재발견
한국 '시간'이 세계 중심이다
다른 어떤 요소보다 권력 이동을 확실하게 드러낸 건 시간이었다.
지난 세기 개발도상국 한국이 개최한 88 서울올림픽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던 2018 평창 동계올림픽조차 경기 시간은 한국 시청자가 아닌 미국 시청자 보기 편한 현지 프라임타임 편성에 맞춰 오전에 열렸다. 변방 한국이 당연하게 겪어온 일이다.
이번 공연은 정반대였다. 우리가 공연을 즐기기 딱 좋은 한국시각 밤 8시, 그러니까 지금껏 팝의 중심으로 군림해온 미 서부시간 오전 4시(동부 7시)에 공연이 시작됐다. 라이브 스트리밍을 보려면 주말 새벽을 반납해야 했다. 우리로선 대수롭지 않을지 몰라도 넷플릭스로서는 엄청난 도박이 아닐 수 없다.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많은 시청 수를 기록한 마이크 타이슨 대 제이크 폴 권투 시합(2024년 11월 15일)은 미국 프라임타임인 금요일 오후 5시(동부 8시)였다. 그리고 이런 편성 덕분에 피크 기준 동시 접속 6500만명(3일간 신규 구독자 143만명 확보)이라는 어마어마한 성과를 냈다. 이 중 3800만명(58%)이 미국 접속이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글로벌 플랫폼이어도 가장 큰 시장인 미국 시각에 맞추지 않으면 자칫 치명적인 흥행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확실한 사전 데이터다. 그런데도 넷플릭스는 기꺼이 감수했다.
우선 제작비 못 구해 제작사가 발 동동 구르던 '오징어 게임'(오겜·2021) 때와 달리 이번엔 더 절박한 쪽이 넷플릭스였다. 게다가 BTS라면 이런 시간대조차 약점으로 작용하지 않을 거라 판단했을 거다. 실제로 브랜든 리그 넷플릭스 논픽션 시리즈 및 스포츠 부문 부대표(VP)는 공연 전 "선택지가 많아 연결될 기회가 갈수록 사라지는 요즘, 세계 관객을 하나로 묶어주는 유일무이한 순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 설명하자면, BTS의 막강한 팬덤(Army)과 폭발적 화제성이라면 세계 시청자가 장소 불문 동시에 접속하는 거대한 글로벌 이벤트를 충분히 성공시킬 것으로 기대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바람 그대로의 결과가 나왔다. 한국과 시차가 크지 않은 아시아뿐 아니라 미국 등 북미와 유럽을 포함해 93개국 중 77개국에서 전부 1위를 기록했고, 나머지 국가도 3위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플릭스패트롤 비공식 집계).
미국 새벽이라는 치명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런 성과를 냈다는 건 BTS가 전 세계를 동시에 연결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콘텐트라는 걸 입증했다는 얘기다. 세계를 얼마든지 한국 시각에 맞춰 도열시킬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BTS 예술혁명』(2022)을 쓴 이지영 한국외대 교수도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이 문화 수출 단계를 넘어 세계가 한국 시각과 생활 방식을 따라오는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평가했다.
글로벌 '플랫폼'을 도구로 쓰다
오겜에 이어 지난해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역대급 글로벌 흥행 성공으로 최근 한국 국가 브랜드와 K 컬처 위상이 한층 더 가파르게 올라갔지만, 장기적인 생태계 교란 우려 탓에 엔터 업계 관계자뿐만 아니라 적잖은 보통 한국인들 역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국뽕'이 차오르는 한편으로, 콘텐트는 한국이 만들지만 막대한 수익은 플랫폼이 전부 가져가는 '을의 구조'가 더 뼈아프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최소한 이번 BTS 공연은 이런 '갑을 구조'의 완전한 전복이었다. 수백억 원대로 알려진 공연 제작비를 넷플릭스가 전부 대면서도 지식재산권(IP)은 한국(BTS와 하이브)이 확보했기에 하는 말이다. 막대한 제작비보다 훨씬 더 많을 중계권료까지 내고도 넷플릭스는 27일 공개하는 다큐멘터리 'BTS:더 리턴' 등 일부 2차 저작권만 가져갔다. 제작비와 유통 채널이 없어 글로벌 플랫폼의 간택만 기다리던 '을'의 콘텐트 공급자 한국이 이젠 유리한 조건에 플랫폼을 고르는 '갑'의 IP 보유자 권력을 쥔 상징적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022년 11월 20일 서구 팝의 살아있는 전설 엘튼 존의 LA 다저스타디움 실황 공연을 스트리밍한 글로벌 OTT 디즈니+는 중계권과 후속 다큐멘터리 패키지로 3000만 달러(400억~450억원)를 지불했을 뿐 제작비까지 대진 않았다. 한마디로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넷플릭스가 그만큼 간절하게 이 공연을 원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이런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여러 미디어 전문가가 주장하는 플랫폼 종속론을 이번 BTS 공연에 기계적으로 들이대는 건 좀 우습다. 오겜·케데헌 때는 넷플릭스가 한국 콘텐트를 헐값에 사들여 재미를 보는 구조였다면, 이번 라이브는 하이브가 글로벌 유통망으로 넷플릭스를 이용한 형태라서다. 넷플릭스가 향후 돈을 얼마나 벌 것인지, 한국 OTT는 왜 넷플릭스만큼 파괴력이 없는지는 별개의 이야기다.
과거와 현대 잇는 '공간' 보여주다
다들 광화문 얘기만 한다. BTS가 재연하려던 경복궁 근정문에서 흥례문을 거쳐 광화문에 다다르는 '왕의 길'이 파리 에펠탑 앞 광장에 버금가는 세계적 문화 아이콘으로 떠오를 거란 기대는 물론 근거가 있다. 아니, 분명 그렇게 될 거다. 3년 9개월 만에 나온 이번
앨범 '아리랑' 타이틀곡 '스윔(Swim)' 뮤직비디오 티저가 공개되자마자 촬영장소로 알려진 포르투갈 리스본 해양박물관이 아미들의 워너비 성지가 된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공연 직후 SNS와 일부 평론가들 사이에서 "슈퍼볼 하프타임 쇼 등을 연출한 거장 해미시 해밀턴의 명성에 비해 연출이 기대에 못 미쳤다"는 비판이 꽤 나왔다. "시민 불편을 야기하면서 국가 상징 공간을 내줬더니 왜 광화문 말고 반대편 도심 전경을 자주 비추나"라는 불만의 목소리가 가장 크다. "영국인이라 광화문이라는 공간의 상징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투다.
현장에서, 그리고 다음 날 넷플릭스 TV 화면으로 한 번 더 본 내 생각은 다르다. 괜한 트집이다. 14.7m 높이 거대한 큐브 조형물이 저 뒤 광화문을 액자처럼 감싼 무대는 그 자체로 헤리티지(문화적 자산)를 드러내는 장치로서 역할을 다 했다. 그날 공연 중간중간 뒤돌아볼 때마다 경쟁하듯 빛을 내뿜으며 시선을 강탈하는 도심 대형 전광판들은 눈앞의 BTS만큼이나 비현실적으로 세련되게 서울이 어떤 곳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세계 어느 도시가 뉴욕 타임스퀘어 부럽지 않은 화려한 전광판이 흐르는 마천루와 마주 보는 위치에 문화유산을 품고 있나. 이번 BTS 라이브는 역사성과 힙함을 동시에 보유한 서울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개럿 잉글리시 던+더스티드 총괄 프로듀서는 "광화문과 경복궁이라는 역사적 장소를 존중하면서도 BTS의 현대적 요소를 어떻게 녹여내면 좋을지 고민했다"며 "과거와 미래 사이의 대화를 원했다"고 했다. 연출은 이를 제대로 살렸다.
그런데 왜 광화문이었을까. 하이브 관계자는 "방시혁 의장 고집"이라고 했다. "BTS가 한국에서 시작한 만큼 4년 만의 컴백 출발점은 한국, 그것도 가장 상징적인 공간 광화문이어야 한다"는 이유였다는 것이다. 아마 광화문이라는 헤리티지를 온전히 BTS 브랜드 삼으려는 욕심이 아닌가 싶다. 디올(Dior)이 썼던 전략처럼 말이다. 디올은 2000년 왕실 복식 코드를 컬렉션에 심는 데 이어 2007년 FW 오트 쿠튀르 쇼는 아예 베르사유에서 열었다. 왕실의 상징성을 끌어와 디올 브랜드를 문화유산 급 존재로 격상시키는 대담한 시도였고, 통했다.
열린 광화문을 폐쇄 공간으로 만든 건 BTS가 아니라 사고날까 겁에 질린 한국 공권력이었는데도, 욕은 BTS가 다 먹었다. 공연 직후 음원 줄 세우기나 음반 판매량 소식이 들려오니 당장 사람들은 곧 시작할 글로벌 투어 수익, 그래미 수상 등 BTS가 세울 기록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또 욕할 준비 하면서. 기록을 깨든 말든 다큐 속 "실패가 어딨나, 다 과정인 거지"라는 멤버들 발언처럼 무슨 상관인가. 설령 여기 못 미친다 해도 그건 그저 김연아의 소치 동계올림픽(2014) 은메달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