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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아르헨 군사 쿠데타 50주년…"잊지도 않고 용서도 없다"

연합뉴스

2026.03.24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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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명 사망·실종된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국가폭력 재조명
[르포] 아르헨 군사 쿠데타 50주년…"잊지도 않고 용서도 없다"
3만명 사망·실종된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국가폭력 재조명

(부에노스아이레스=연합뉴스) 김선정 통신원 = "절대 잊지도 않고 용서도 없습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한 어르신이 젊은 여성의 사진을 건 채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올해 77세의 산티아고 카라라는 50년 전 군사정권에 의해 실종된 아내를 기리기 위해 매년 이날 거리로 나온다.
사진 속 인물은 당시 스무살이었던 그의 아내 베아트리스다.
1976년 9월에 군에 불법 연행되어 수년간 구금됐고, 끝내 그녀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았다.
카라라 역시 같은 시기 구금됐다가 1983년 민주화 이후 풀려났지만, 아내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담담하게 "이미 그녀는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군사 쿠데타 50주년의 의미를 묻는 연합뉴스의 질문에 그는 목이 메는 듯 잠시 눈물을 글썽이더니 "결코 잊지도 않고 용서도 없다"고 짧게 대답했다.
1976년 3월 24일 군부 쿠데타로 시작된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 시기, 이른바 '더러운 전쟁'동안 약 3만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르헨티나에서 1976년 3월 24일 발생한 군부 쿠데타가 50주년을 맞으면서, 당시 군사정권이 자행한 강제 실종과 고문, 살해 등 국가폭력이 현지 언론과 외신을 통해 다시 조명되고 있다.
1976년 새벽, 아르헨티나에서 발생한 쿠데타는 1983년까지 약 7년간 이어진 군사독재의 출발점이 됐다.
이미 5차례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던 아르헨티나였기에 당시 제한된 통신 환경 속에 시민 상당수는 이를 단순한 정권 교체로 받아들였으나, 이후 대규모 탄압의 실상이 드러났다.
이전 쿠데타들과 비교했을 때, 6번째 마지막 쿠데타는 훨씬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국가 테러리즘을 자행했다는 점에서 가장 비극적인 시기로 아르헨티나 역사에 기록된다.
군사정권은 반체제 인사로 지목된 이들을 대상으로 납치·고문·살해를 조직적으로 실행했다.
아르헨티나 사법부는 이를 훗날 집단학살 맥락의 범죄로 규정했으며, 인권 단체들은 사망·실종자를 약 3만 명으로 추산한다.
한 생존자는 현지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삶이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며 "실종자 가족들은 사회적 고립 속에 놓였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쿠데타 이전부터 정치적 폭력은 심화된 상태였다.
좌파 게릴라 조직 몬토네로스와 우파 준군사조직 트리플 A, 혁명노동자당(ERP) 등이 충돌하며 사회 불안이 커졌다.
1975년 정부가 군에 '반체제 세력 소탕'을 지시하면서 군의 정치 개입은 확대됐고, 이후 이른바 '전복 세력'의 범위는 노동자·학생·지식인·예술가 등으로 넓어졌다.
군사정권 시기의 특징은 '실종자'의 대규모 발생이다. 이들은 체포된 뒤 공식적 사법 절차 없이 사라졌고, 가족들은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1984년 조사에 따르면 실종자 가운데 노동자가 30.2%로 가장 많았고, 학생(21%), 직장인(17.9%) 순이었다. 특히 젊은 층 피해가 두드러졌다.
1976년 9월 '연필의 밤' 사건에서는 고등학생들이 집단으로 납치됐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현재까지 행방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힐베르토(80) 씨는 연합뉴스에 "일부 사람들은 '불순한 정치 활동'을 한 사람만 잡혀갔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며 "일반인인 나도 이유도 없이 어느 날 그냥 끌려갔으며, 아버지 친구가 경찰서장이어서 겨우 인맥으로 풀려났다"고 말했다. "잡혀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는 건 암묵적으로 모두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군사독재 정권은 전국에 비밀 구금시설을 설치해 고문을 자행했다.
대표적 시설인 해군 기계 학교(ESMA)에서는 정치범들이 강제노동과 학대를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죽음의 비행'으로 불리는 방식의 살해도 이뤄졌다.
이는 구금자들을 약물로 의식을 잃게 한 뒤 항공기에서 바다로 투척하는 방식으로, 일부 시신은 해안에서 발견됐지만 대부분은 수습되지 않았다.

1983년 민주화 이후 아르헨티나는 진상 규명에 착수했다. 1984년 국가실종자조사위원회(CONADEP)가 구성됐고, 1985년 군부 지도자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그러나 유가족 상당수는 여전히 희생자의 구체적인 사망 경위와 시신 행방을 알지 못하고 있다.
한 피해자 가족은 "사망 사실은 알지만, 마지막 순간을 모른다는 점이 가장 큰 고통"이라고 말했다.
최근 코르도바주 라페를라에 소재한 과거 비밀 구금시설 부지에서 실종자 12명의 유해가 확인됐다.
이 중 실종자 마리오 알베르토 니볼리의 유해도 있었으며, 당시 4개월이었던 그의 딸 마리아 솔레닫은 "이제 나는 더 이상 실종자의 딸이 아니다. 나의 아버지는 '실종자'이기를 멈췄으며, 이제 나는 아버지를 잃은 '고아'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실종'이라는 단어가 주는 끝없는 희망고문과 고통에서 벗어나, 비로소 아버지를 애도할 수 있게 된 유족의 복합적인 심경을 담아 현지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실종'이라는 단어가 남긴 끝없는 불확실성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거리에서 마주한 시민들의 구호는 단순했다.
"다시는, 절대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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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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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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