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억, 많게는 조 단위 국부가 걸린 ‘투자자-국가 간 분쟁해결(ISDS)’에서 한국 정부가 최근 연승을 이어가고 있다. 글로벌 자본의 공세 속에서 한국의 방어를 실질적으로 이끈 주역은 법무부 국제투자분쟁과다. 실무를 총괄하는 조아라 국제투자분쟁과장(사법연수원 38기)은 “사건의 실체를 끝까지 규명하는 데 필수적인 검사의 수사 노하우가 ISDS 방어의 핵심 전력이 됐다”고 말했다.
법무부는 지난해부터 론스타, 엘리엇, 쉰들러 등 한국을 상대로 제기된 굵직한 ISDS 사건에서 잇따라 성과를 냈다. 세 사건 모두 최소 8년에서 길게는 10년 이상 이어진 장기 분쟁이다. 이번 결과로 정부가 당장 부담을 피한 금액만 약 8800억원에 달한다. 단순한 금전적 성과를 넘어 국가 재정과 정책 집행의 자율성을 동시에 지켜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 과장은 지난 20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영국 법원에서 취소 소송 끝에 원중재 판결을 무효로 만든 엘리엇 사건을 언급하며 “방어 과정에서 가장 민감했던 쟁점은 ‘국민연금’의 국가기관성 인정 여부였다”고 밝혔다. 재판부가 엘리엇 측 주장대로 국민연금을 국가기관으로 인정했다면, 국민연금이 전 세계에서 수행하는 투자 행위가 향후 투자협정 위반으로 연결돼 국제 분쟁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컸다는 설명이다.
쉰들러 사건의 승소에 대해서도 의미를 짚었다. 조 과장은 “공정거래위원회나 금융감독원의 일상적인 실무 관행과 처분을 문제 삼은 사안이었다”며 “패소했다면 개별 사건을 넘어 정부 기관 전반의 규제 권한 행사를 크게 위축시켰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정당하게 집행한 규제조차 거액의 배상 책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였던 만큼, 이번 판정은 이른바 ‘칠링 이펙트(규제 위축 효과)’를 사전에 차단했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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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규제 공정하다는 인식 심어줘"
한국에 대한 국제중재계의 인식 변화도 중요한 성과다. 조 과장은 “국제중재 분야는 좁은 편이라 업계가 한국에 대해 어떤 공감대를 형성하게 만드느냐가 중요하다”며 “이번 결과를 통해 한국의 행정·입법·규제가 폐쇄적이거나 차별적이지 않고 합리적이며 공정하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 큰 자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같은 평판은 향후 분쟁에서 중재인들이 사안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며 “단순히 몇 건의 승소를 넘어선 효과”라고 강조했다.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도 ISDS는 막대한 자본과 함께 해당 국가 내 사업 지속 여부까지 고려해야 하는 고위험 수단이다. 이런 점에서 국가의 대응력이 높아질수록 외국인 투자자가 무리한 논리로 ISDS를 제기하는 시도 자체를 줄이는 예방 효과도 거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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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적 진실 발견하는 수사와 맞닿아”
조 과장은 최근 성과에 대해 “과장을 포함해 검사 4명, 사무관 3명, 전문위원 2명, 법무관 2명, 행정계장 2명 등 법무부 인력 13명이 중심이 됐다”며 “당시 처분 부처와 긴밀히 협력하고, 국제중재 경험이 풍부한 외부 로펌과 적절히 역할을 분담한 결과”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 국제중재 과정에서 검사가 맡은 핵심 역할을 상세히 설명했다.
ISDS 대응의 출발점은 과거 사실관계를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수년 전 행정 처분의 경위와 판단 과정을 명확히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무원 입장에서는 막대한 배상 책임이 걸린 국제 분쟁에 휘말릴 경우 책임 소재를 우려해 방어적으로 대응하기 마련이다. 이로 인해 사실관계 규명이 지연되거나 자료 제출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잦다.
조 과장은 국제중재 특유의 ‘불리한 추정’ 원칙을 중요한 변수로 꼽았다. 그는 “충분히 존재할 것으로 보이는 자료를 제출하지 않으면 중재판정부가 해당 사실을 불리하게 인정하는 구조”라며 “이 때문에 방어 전략은 숨기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설명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지점에서 검사의 수사 경험이 강점을 발휘한다는 설명이다. 조 과장은 “검사는 평소 수사와 조사를 통해 사람을 설득하고 핵심 진술과 숨겨진 자료를 이끌어내는 훈련이 철저히 되어 있다”며 “짧은 시간 안에 방대한 기록을 분석해 쟁점을 정리하고 설득력 있게 구성하는 능력이 ISDS 대응에서도 그대로 활용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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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데이터 무제한 사용하는 통신요금제와 같아”
국가 예산 절감 측면에서도 내부 인력의 역할이 컸다. 조 과장은 “검사는 야근 수당이나 초과근무 수당이 없어 사실상 ‘무제한 정액제’와 같다”고 웃으며 “밤낮없이 시차와 상관없이 기록을 파고드는 내부 인력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 수십억 원대 외부 로펌 비용을 아끼고 국민 혈세를 절감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일정 금액으로 데이터와 통화를 무제한 사용하는 통신요금제처럼, 검사 역시 초과근무 수당이 없어 추가 인건비 부담이 크지 않다는 취지의 설명이다.
전 세계적으로 외국인 투자가 확대되면서 통상 마찰에 따른 ISDS 분쟁 역시 증가하는 추세다. 조 과장은 “현재 대통령 훈령 수준에 머물러 있는 ISDS 대응 체계를 법률로 격상할 필요가 있다”며 “입법·사법·행정을 아우르는 범정부 차원의 통합 대응과 사전 예방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당 법안은 지난 17일 박균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