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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 3월 수상작] 답안지를 보면서

중앙일보

2026.03.25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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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답안지를 보면서
황혜리

빨간 펜을 드는 순간 뒤태가 미심쩍다
우리는 옳았던가 갸웃대는 생각머리
그러다 미로에 갇힌 나를 보네, 이 순간

매일 마주 보는 거울 속 모습에서
자꾸만 숨어드는 나를 찾아내는 일
이제는 조명이 아닌 자연 빛을 보는 일

정답으로 가는 길이 수없이 꼬이는 건
사실은 그게 아닌 참마음을 읽는 거
자신과 맞서 싸우며 타협하지 않는 거

평균을 웃돌던 때 그 어디 있었건만
지금은 엉거주춤 머무는 가장자리
주먹에 힘을 주면서 영근 날을 골라본다

◆황혜리
1984년생. 북경중의약대 수학, 홍익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졸업. 2023년 중앙시조백일장 10월 차상. 2018년 중앙시조백일장 4월 장원.

차상
화해라면
이상숙

사춘기와 갱년기 곱슬머리 엄마와 딸
딱딱하게 말하면 부서지는 우리 사이
불만을 반으로 잘라 한바탕 끓여본다

한마디 건네봐도 말끝마다 뒤엉킬 때
부드러운 면발처럼 조절이 가능할까
후루룩 꿀꺽 삼키다 목소리에 데인다

뾰로통 앞에 놓고 불어터진 두 얼굴
뜨겁게 담긴 반항 말없이 식어가면
미안해 간편한 말투 곱슬하게 풀어진다

차하
버드세이버
임지나

바람에
살았어도
흠 하나 없었는데

작은 부리 거의 다 깨어진 곤줄박이

위액에
돌돌 말려져
수의를 입고 있다

드높은
방음벽은
누구를 위한 걸까

창 너머
사람에게
투명하게 속았다

두 눈은 죽음의 방향, 녹이 스민 쇠구슬

하늘에서
몸을 몰며
자유롭게 노는 꿈

다 같이 날아가서 대기를 관통하라

천적이 목숨을 구한다
새의 진정(眞正)
버드세이버

이달의 심사평
현대시조의 동력은 일상의 균열을 포착해 서사로 재구성하는 힘에서 나온다. 이번 응모작들은 ‘지금 여기’의 목소리를 자연스러운 화법으로 담아내며 시조의 서사적 잠재력을 증명했다.

장원 황혜리의 ‘답안지를 보면서’는 채점이라는 행위를 실존적 성찰로 밀어 올린 솜씨가 정교하다. 빨간 펜을 든 채 “뒤태가 미심쩍다”고 서술하는 대목에서 주체의 고뇌가 생생하게 읽힌다. 특히 정답이라는 정형화된 길을 거부하고, 스스로 미로에 갇혀 “참마음”을 읽어내려는 내면의 투쟁을 조직화한 점이 돋보인다.

차상 이상숙의 ‘화해라면’은 사춘기와 갱년기의 갈등을 ‘라면’으로 풀어낸 감각이 흥미롭다. 불만을 반으로 잘라 끓이고, 면발의 탄성으로 화해를 점치는 전개가 유연하다.

차하 임지나의 ‘버드세이버’는 죽은 곤줄박이를 통해 생태적 공존의 화두를 던진다. “수의를 입고 있다”는 처연한 묘사와 방음벽을 향한 시선은 개인의 서사를 사회적 층위로 확장한다. 인간의 편의에 속아 추락한 새의 비극을 통해 자유로운 대기를 환기하는 힘이 묵직하다.

심사위원 이송희(대표집필)·이태순

초대시조
행운을 흥정하다
김경미

네잎클로버 찾자고 세잎클로버 밟듯이
하루를 녹이고 싶어 홀로 펼친 타로점
들킬까 숨어 벼르던 행운을 흥정한다

희망 한 장 얻기 위한 순조로운 괘를 줍다
기억을 빼내 보면 어제의 병 도져 나와
움푹 팬 자리만큼씩 운세를 뒤적인다

숱하게 벙글다 만 침묵을 넘겨봐도
짜임이 헐거웠던 액땜을 곁에 두고
아침을 깨울 때마다 버릇을 묻고 있다

◆김경미
경북 의성 출생. 2012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조집 『꽃도 성깔대로 핀다』(2021), 『주말 오후 세 시』(2016). 경북작가상 등 수상.

“네잎클로버 찾자고 세잎클로버”를 밟는 것은 오지 않는 행운을 찾느라 이미 누리고 있는 행운을 가벼이 여기는 것과 같다. 현재가 고단할수록 불확실한 미래를 점쳐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타로점도 그런 맥락에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다만 불가항력적인 행운은 거래나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알면서도 고단한 일상을 위로받고 싶은 화자는 카드 속에서 행운을 얻어내고자 하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준다.

이 글을 통해서 작가는 행운이란 흥정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태도에서 온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으리라. 요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행운이라면 우리 삶은 얼마나 불투명할까. 이른 봄 피어나는 복수초처럼, 제 본분을 다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확실한 행운이 아닐까 싶다.

시조시인 강정숙

◆응모안내=매달 18일까지 중앙 시조 e메일([email protected])으로 접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도 받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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