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은 솔직하다. 식물만큼 그렇다. 그 솔직함은 때로 비정함으로도, 때로 깊은 신뢰로도 나타난다. 같은 공간에서 한 가족이 되어 사는 동물들, 가령 개가 그렇듯 말이다. 내면과 외면이 따로 있어야 거짓을 행할 수 있을 텐데, 동물은 내면과 외면이 없다. 먹이를 향한 욕망 때문에 사납고, 똑같은 의미에서 함께 살아온 가족들에게 충실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동물과 함께 산다. 동물이 수행하는 기능, 예컨대 집을 지키거나 쥐를 잡거나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저런 솔직한 동물의 세계의 일원이 되는 게 좋아서 함께 산다.
AI가 만든 감쪽같은 동물 영상
진짜 동물에 대한 오해 유발
개·고양이와 함께한다는 것은
한 세계를 끝까지 책임지는 일
개나 고양이를 너무도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 화를 내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사르트르는 자서전 『말』에서 ‘개의 묘지’를 친구와 방문했던 일화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 여자가 자신의 죽은 개의 무덤 앞에 와 있다.
“‘폴로니우스, 너는 나보다 훌륭한 놈이다. 내가 먼저 죽었다면 너도 따라 죽었을 게다. 그런데 네가 죽었는데도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니!’ 하고 슬픔에 젖은 한 여인이 말하고 있었다. 나와 동행했던 미국인 친구는 그만 비위가 틀려서 시멘트로 만든 개를 걷어차 한쪽 귀를 깨어 버렸다. 그것도 무리가 아니다. 어린애와 짐승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은 인간을 배반하면서 사랑하는 것이니까 말이다.”(정명환 역)
미국인은 개를 너무도 사랑하는 것에 대해 빈정 상한 나머지 묘지에 장식해 놓은 개 석상의 귀를 깨트려 버렸던 것이다. 여기에 드러나 있는 것은 깊은 인간중심주의다. 동물을 너무 위하는 것은 인간을 저버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우선순위에서 인간이 가장 먼저 와야 하며 인간이 가장 존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왜 인간이 가장 존엄하다고 믿어야 할까? 인간만이 목적이고 그 외 다른 생명은 인간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인가? 그래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 입문』에서 이렇게 비꼬듯 반문했다. “도대체 이 인간이라는 존재자는 무엇이 별났기에!”
인간중심주의보다 뿌리 깊은 동물 존중 우리는 왜 인간을 위해서 동물이 죽어야 하는지, 반대로 동물을 위해서 인간이 희생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은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만일 윤리가 인간종의 이기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들뢰즈가 종종 말하듯 우리는 동물을 대신하여, 동물을 위하여 말하는 자일 수 있는 것이다.
동물에 대한 존중은 사실 인간중심주의보다 뿌리가 깊다. 기원전 570년에 태어난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매를 맞고 있는 강아지를 보게 된다. 그 강아지를 불쌍히 여긴 피타고라스는 말한다. “때리지 마라. 내 친구의 영혼이다. 울음소리에서 그를 알아보았다.”
영혼은 불멸하며, 식물이나 동물 그리고 인간으로 환생한다는 피타고라스의 생각은 수학에 관한 그의 이론들보다 사상사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피타고라스는 이집트로 건너가 신전에서 일하기도 했던 사람이다. 이집트의 영혼불멸론은 피타고라스에게 영향을 주었고, 피타고라스의 영혼불멸론은 플라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플라톤의 영혼불멸론은 고대 세계가 사라진 뒤에 기독교의 교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집트에서 시작한 영혼불멸론이 고대 그리스 철학과 중세 기독교를 거쳐 현대에까지 이르는 기나긴 노정에서 피타고라스는 중요한 연결 고리를 이루며, 강아지에게서 친구의 영혼을 발견하는 저 일화는 피타고라스의 사상을 상징적으로 집약하고 있다.
관점을 바꾸어 말해보자면, 저 일화는 동물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동물은 귀중한 친구와 똑같다는 것, 무엇보다 인간과 다를 것이 없는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인류 최초의 사상사적 주장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저 사상의 끝자락에 있는 우리 역시 동물의 친구이고 동물을 보호하는 일을 즐거워하며, 동물의 눈 속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표현하는 영혼을 만난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AI가 만들어낸 위험한 가짜 동물의 시대이기도 하다. 유튜브에는 너무도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는 개들과 고양이들 동영상이 넘친다. 말할 수 없이 예쁘고 너무도 인간적이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고, 가사 일을 도우며 아이도 돌보는 개나 고양이를 사람들은 처음에는 ‘진짜’인 줄 안다. 인간과 똑같이 희생할 줄도 아는 사자의 행동은 너무나 놀랍다. 그러나 자주 보다 보면, AI가 만들어낸 동물 이미지의 뻔한 패턴을 눈치채게 된다. 인간에게서 특유의 땀 냄새나 입 냄새가 나는 것처럼 AI가 쓴 글이나 그림에서는 특유의 기계 냄새가 난다. 재주꾼 AI의 발명품은 처음엔 흥미로웠지만 이제는 금방 물리는 음식처럼 식상하다. AI는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작가’인가? 저 매너리즘을 밝히는 AI 특유의 문체론, AI 특유의 화풍론이 앞으로 평론가들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매너리즘은 극복되고, 훨씬 진짜 같은 AI 이미지는 버전업되며 계속해서 출현할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정말 꼭 들게 생기고 너무도 인간 같이 행동하는 동물, 한 마디로 ‘가장 귀여운 동물’, 그러면서도 허구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동물의 모습으로.
동물의 야생성·고집·체취 그리하여 AI가 만들어낸 동물 이미지와 사랑에 빠져든 아이들이 입양이라도 하려고 진짜 동물을 만나게 되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인간 세계에 태생적으로 저항하는 야생성, 고분고분하게 순치되지 않는 고집, 각각의 동물 종들이 가진 특유의 냄새, 동물이 품고 있는 각종 질병의 세계가 나타나는 까닭이다. AI가 만들어낸 인간 입맛에 꼭 맞는 동물의 이미지, 저 가짜 생물 도감이 진짜 동물에게 가는 길을 방해하는 것이다.
동물과 함께 산다는 것은 마음에 꼭 드는 장난감을 하나 얻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한 세계를 인내심 속에 책임지는 일이다. 어쩌면 종교적 표현을 빌려 ‘계약’이라고 일컬을 수도 있지 않을까? 늘 생활과 마음을 꼭 쥐고 있는 파기할 수 없는 계약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