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쯤 전의 일이다. 한 학기에 30명쯤 장학금을 받는데, 학과 조교가 장학생 명단 초안을 만들어서 가지고 오면 교수회의에서 수정 후 확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마침 그 업무를 담당하는 주임교수였는데,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학과 전체에서 수석을 차지한 학생은 모든 과목 A+를 받아서 만점이었는데도 장학생 명단에 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니 그 학생은 압구정동에 살기 때문에 굳이 장학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장학금이란 것이 뛰어난 학업성취에 대한 포상의 성격인지 아니면 형편이 어려운 사람도 공부할 수 있도록 돕는 지원의 성격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형편이 넉넉하다고 해서 1등조차 아무 보상을 받지 못한다면 누가 굳이 열심히 공부하려고 할까. 게다가 장학금은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다. 외국에서는 나이 60이 넘은 세계적인 학자들조차 이력서에 학창 시절 장학금 받은 이력을 빼놓지 않고 쓸 정도로 성실히 살아온 삶의 증거이기도 하다. 결국 다른 교수들과 의논 끝에 1등에게는 장학금을 주기로 하고, 다음 학기부터는 장학금이라는 돈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이 사람이 뛰어난 학업성취를 이루었다는 포상을 만들어서 상급학교 지원이나 취직 시에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부동산 자금 자본시장 보내는 게
국정 최우선 과제인 듯 보이나
모든 시장엔 승자와 패자가 존재
자본시장도 격차 줄이진 못할 것
공부 잘한 사람이 장학금도 싹쓸이한다면 분명한 격차가 존재하게 되고, 누군가는 그것을 불공정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거꾸로 공부를 아무리 잘했어도 아무 상도 주지 않는다면 성취에 대한 보상이 없는 세상이고 따라서 아무도 어떤 성취도 하지 않으려 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선택은 어떨지 궁금하다. 공부 잘하면 칭찬해주는 학교와 잘하든 못 하든 똑같이 대하는 학교. 당신의 자녀를 어느 학교에 보내고 싶은가.
나라도 마찬가지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의 자산지니계수가 0.6이 넘어서 역대 최고치가 되었다며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보도되는데, 진실은 수치가 주는 공포감과는 좀 다르다. 불평등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소득지니와 자산지니로 나뉘는데, 그때 그때의 소득 흐름의 불평등을 나타내는 소득지니와 달리 그동안의 격차가 누적된 자산의 차이를 나타내는 자산지니는 원래부터 높은 것이 정상이다. 보통 소득지니의 두 배쯤 된다. 서울에서 제일 비싼 아파트 가격이 100억원에서 200억원이 됐다 한들 나의 삶과는 실제로는 아무 관계도 없지만, 지니계수 산식의 특성상 그 값은 올라가게 돼 있다. 다른 OECD 국가들과 비교해도 한국의 자산지니는 중간 혹은 중상 정도 구간에 머무른다.
이재명 정부에서는 내란 청산에 이어 마치 부동산이 국정의 최우선 과제인 것처럼 보인다. 대통령의 인식은 부동산 투기를 내버려두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고, 하다못해 다주택을 가진 사람은 부동산 정책 관련 업무에서도 배제한다고 한다. 그렇게 부동산으로 흘러가지 못하는 자금은 자본시장으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것 같다. 상법개정, 자사주 소각, 코스피 5000은 물론이고 세금 폭탄을 맞는 부동산과는 달리 각종 분리과세, 소득공제, 양도세 감면 등을 통해 돈이 흘러들 수밖에 없는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하나씩 따지고 들자면 자사주 소각 함부로 했다가 2003년 소버린 사태처럼 한국의 대표적 기업들이 기업 사냥꾼의 표적이 되었을 때 경영권 방어를 어떻게 할 것이냐 등의 구체적인 문제들이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저평가 되어온 자본시장을 육성하겠다는 것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부동산 대신 자본시장이 과연 격차를 줄여줄 것인지는 회의적이다. 모든 시장에는 항상 승자와 패자가 있다. 부동산 시장에서는 노른자 지역에 먼저 입성한 사람이 승자가 된다. 그 지역의 부동산 가치가 상승함에 따라 일찍부터 들어와 있던 사람들은 점점 부자가 되고 미처 입성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진입장벽은 높아진다. 먼저 와있던 사람들이 전부 투기꾼인 것도 아니다. 강남 개발 이전에 압구정에서 배추농사 짓던 사람들이 준재벌이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투기이든 운이든 먼저 와있던 사람의 자산은 커지고 남들이 쉽게 진입하지 못하는 상층으로 고착된다. 반면 자본시장에서는 돈이 많은 사람이 더 큰 승자가 된다. 월급 쪼개 투자하는 사람은 여유자금으로 투자하는 사람을 절대 못 이긴다. 월급 쪼개 투자하는 사람은 한번이라도 잃으면 큰일이다. 하루종일 주식가격 들여다보다가 쫄아서 팔면 오르고 그래서 사면 내린다. 여유자금으로 투자하는 사람의 손실은 숫자상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 오를 때까지 기다리면 그뿐이다. 소액으로도 투자를 시작할 수 있는 자본시장은 부동산에 비해 진입장벽은 낮지만 격차의 폭은 더 크다. 우리는 격차의 고착이냐 격차의 확장이냐 중에서 선택하는 것일 뿐, 격차를 없애지는 못한다. 이것이 과연 국정의 최우선 과제일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