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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배의 시선] 서해 수호의 날에 떠올린 30년 전 강릉의 밤

중앙일보

2026.03.26 08:10 2026.03.26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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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배 논설위원
1996년 9월 18일 새벽 강릉 앞바다에 북한 잠수함이 좌초된 상태로 발견됐다. 68년 1월 21일 김신조 부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을 들어보긴 했지만, 북한군이 후방 지역에 직접 침투한다는 것을 상상하기 쉽지 않았다. 당시 사회부 기자였던 필자도 취재를 위해 강릉으로 갔다. 사건 초기 일주일 정도는 군 당국이 취재진을 통제하지 않아 직접 현장을 가볼 수 있었다. 어느 날 밤 산 중턱에서 매복에 나선 군인들을 만났다. 한 시간 남짓 있었지만 아직도 그 기억이 남아 있다.

96년 북 잠수함 침투…18명 희생
이를 기억 않으면 누가 나서겠나
제복 입은 이에 대한 존중 필요
1996년 9월 18일 강릉 안인진리 앞바다에 나타난 북한 잠수함 우리 군이 수색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사건 첫날 잠수함 승조원은 집단 폭사했지만 도주한 나머지는 특수부대원이었다. 기습 사격에 이미 아군 전사자가 나온 상태였다. 밤공기는 차가웠고, 참호 속 병사 몇몇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 떨고 있었다.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보이지 않는 적이 나를 향해 총탄을 날릴지 모른다는 원초적 두려움이었다. 국가 안보는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49일간 이어진 작전에서 군인·경찰·예비군·민간인 18명이 전사하거나 사망했다. 올해가 사건 발생 30년이다. 과연 그들은 얼마나 기억되고 있을까.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경험 위에 서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군은 ‘외침을 막는 존재’로 인식됐다. 한국사의 명장 대부분이 외침을 막은 영웅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은 전혀 다른 조건에 놓여 있다. 에너지와 교역을 해외에 의존하는 구조 속에서 안보는 더 이상 국경선 안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국제 정세를 보면 힘의 논리가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최근 들어 미국-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해협이 막히면서 유가가 치솟고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제 국익이 있는 곳까지 안보의 범위도 확장될 수밖에 없다. 이번 사태가 길어지면 역할 분담 요구가 커질 가능성은 충분하다. 지금은 미국의 주요 동맹국이 신중한 태도를 보이지만, 상황이 격화되면 한국 역시 선택의 갈림길에 설 수 있다. 설령 이번이 아니라도 언젠가 닥칠 수 있는 일이다.

이미 우리 해군은 청해부대를 통해 해외 해역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현재는 해적 대응 중심이지만, 위협이 고도화될 경우 임무의 성격과 위험 수준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최신 장비로 무장했을지라도 언제 어디서 뭐가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느끼는 마음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두려움 속에서 임무를 다하는 이들에 대한 감사와 존중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미국의 유명 가수 레이 찰스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레이’에는 1948년 주인공이 장거리 버스를 타는 장면이 나온다. 흑인에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퉁명스럽고 고압적으로 반응하던 백인 운전사는 레이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시력을 잃었다고 말하자 태도를 바꾸며 돌봐줄 테니 뒷자리에 타라고 말한다. 이는 거짓말이었지만, 극심한 인종차별의 시대에도 다친 2차 대전 참전용사는 존중의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지난달 24일 미 의회에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 연설이 있었다. 이날의 주인공은 한국전쟁에서 소련의 미그기 4대를 격추한 100세의 앨머 로이스 윌리엄스 예비역 대령이었다. 멜라니아 여사가 이 노병에게 직접 미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달아줬다. 평소 대립하던 공화당과 민주당의 의원들이 모두 일어나 그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

우리는 어떠할까. 10년 전 군인 대상 무료 커피 제공을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제복을 입은 이들에 대한 할인이 특혜인지, 아니면 당연한 예우인지조차 사회적 합의가 분명하지 않았다. 이런 인식으로 큰 위기를 감당할 수 있을까.

고대 그리스의 중장보병 밀집 대형인 팔랑크스에서 병사는 왼손에 둥근 방패를 들었다. 긴 창을 쥔 오른쪽은 옆 전우의 방패에 의지했다. 서로를 지킨다는 믿음이 대형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오늘날 제복을 입은 이들의 ‘오른쪽’은 사회적 신뢰와 지지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제11회 서해수호의 날(매년 3월 넷째 금요일)을 하루 앞둔 26일 국립대전현충원 천안함46용사묘역을 찾은 장병들이 전사자들을 참배하고 있다. 김성태 객원기자
오늘(3월 27일)은 제2연평해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서해 수호의 날이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기억하고 예우하는 일은 공동체의 의무다. 이념과 정파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첨단무기가 중요한 시대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전쟁 같은 국가적 위기 앞에 기꺼이 나서는 이들에 대한 사회적 존중이 안보를 지탱하는 힘이며 결국 우리 모두의 일상을 지켜내는 원동력이다.





김원배([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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