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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잊혔던 단군신화 꺼내, 몽골에 맞서는 역사 구심점으로

중앙일보

2026.03.26 08:12 2026.03.26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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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을 되살린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고려는 어떤 나라였는지, 열 글자 문장으로 정리해보았다.

지방 사람들이 세운 나라.
조선과 많이 달랐던 나라.
불교 유교가 공존한 나라.
귀족 문화가 발달한 나라.
넓은 세상과 교류한 나라.
외교로 전쟁을 막은 나라.
딸도 재산을 상속한 나라.

여기 하나를 추가하자면, ‘단군 조선을 되살린 나라’이다. 고려 이전에는 단군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고려 후기 『삼국유사』가 단군신화를 처음 기록했고, 그로부터 단군조선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때 왜 그런 일이 있었던 걸까?

고려 이전에는 단군 계승 인식 없어
몽골과 전쟁 후 내부 결속 필요성

단군과 요, 건국 시기 같다는 사료
중국과 다른 ‘자주국 고려’ 뒷받침

뿌리 깊은 삼국 분립의식도 사라져
마음속의 통일, 조선 왕조로 이어져

고구려 각저총의 씨름 그림 벽화. 나무 아래 곰과 호랑이가 그려져 있어 고구려 사람들이 단군신화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고 유추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사진 한성백제박물관·조법종]
단군 삭제된 삼국의 건국신화
지금이야 우리 역사가 단군이 세운 조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온 국민의 상식이지만,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고대 삼국의 건국 설화에는 단군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고구려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와 하백(河伯)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난 주몽이 건국했고, 백제는 주몽의 아들 온조가 건국했으며, 신라는 큰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가 건국했다고 되어 있다(『삼국사기』). 이밖에 북부여는 해모수가, 가야는 황금알에서 태어난 수로가 각각 건국했다는 전설이 있었다(『삼국유사』). 건국 시조의 출현이 하늘로 연결되거나(부여·고구려·백제) 아버지를 알 수 없는 난생(卵生)으로 꾸며졌는데(신라·가야), 이는 다섯 나라 모두 독자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단군조선을 계승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럼 단군의 존재를 몰랐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실린 단군신화가 옛날부터 구전되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니만큼, 이 이야기가 전해지는 동안 단군이나 조선의 존재는 잊히지 않았을 것이다. 씨름하는 그림으로 유명한 고구려의 각저총 벽화에 곰과 호랑이가 나란히 그려져 있는 데서도 고구려 사람들이 단군신화 내용을 알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조법종, ‘고구려 사회의 단군인식과 종교문화적 특징’, 2001). 고려 전기에도 조선의 존재를 알았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가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건국되기 전 조선의 유민(遺民)들이 서라벌로 이주해 와서 6촌을 이루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단군이 세운 조선이 역사의 시작이라는 생각, 즉 삼국과 고려가 단군조선으로부터 시작된 역사를 계승하고 있다는 생각까지는 미치지 않았다. 그들에게 조선은 그저 먼 옛날에 있다가 사라진, 이야기 속의 나라에 불과했던 것이다.

통일신라의 ‘일통삼한’론
조선이 아니라면 삼국 이전에는 어떤 역사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세 나라 모두 이전 역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부터 역사를 정리할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무력에 의한 강제 통일의 후유증으로 고구려·백제 유민의 반발이 예상되는 가운데 그들의 마음을 사야 한다는 정치적 고려도 한몫했다. 그 결과 삼국 앞에 삼한(三韓)이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삼국은 제각각 세워진 서로 다른 나라가 아니라 마한·진한·변한, 즉 삼한을 계승한 나라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따르면 삼국은 한(韓)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으며, 신라의 통일은 ‘일통삼한(一統三韓)’이라고 해서 셋으로 갈라져 있던 삼한을 다시 하나로 합친 행위로서 역사적 정당성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삼한이 삼국으로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두고 논란을 벌였는데, 신라 말의 대학자 최치원이 마한-고구려, 진한-신라, 변한-백제설을 주장해서 일단 종지부를 찍었다. 삼한이 삼국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이나, 마한이 고구려가 되었다는 등의 학설은 모두 근거 없는 추단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우리 역사의 시작이 삼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민심이었다. 아무리 ‘일통삼한’을 주장해도 고구려·백제 유민들의 자기 역사에 대한 생각이 바뀌질 않았다. 통일 후 200년이 지나도록 고구려·백제 계승의식은 사라지지 않았고, 견훤과 궁예가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건국했을 때 호응하며 분출했다. 후삼국시대는 서로 다른 역사인식의 각축장이기도 했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한 뒤 ‘일통삼한’을 다시 꺼내 들었다. “우리는 하나다”라는 구호 아래 고구려 사람, 백제 사람, 신라 사람의 구분을 없애고 모두 고려 사람으로 만들려는 노력이었다. 공식적으로는 고구려 계승을 내세웠지만 신라와 백제 계승의식을 억누르지 않았고, 잘못 알려진 것처럼 차령 이남 지역을 차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후삼국 통일 후 300년이 지난 13세기 전반까지도 고구려·백제·신라를 부흥시키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긴 세월을 지나며 많이 희석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의 불쏘시개가 될 만큼의 영향력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몽골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몽골과의 전쟁은 3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건국 후 처음으로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었다는 점에서 고려 사회의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강력한 외적과 장기간 싸우면서 내부의 결속이 강화되고, 그 결과 삼국 분립의식이 완전히 사라지는 효과도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로 고구려·백제·신라를 계승했다거나 부흥시키겠다는 사람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은 것이 그 증거이다. 역사인식에도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조선을 발견한 것이다.

전쟁은 졌지만 외교로 나라 지켜
대구광역시 군위군 인각사에 있는 보각국사 일연의 부도(왼쪽). 일연의 비. 많이 훼손되었으나 비문은 남아 있다. [사진 군위군]
조선의 건국 설화인 단군신화는 1280년대에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두 사람 모두 몽골 침략을 직접 겪었고, 전쟁이 끝난 뒤 거의 동시에 책을 썼다. 따라서 이 책에는 전쟁을 경험한 승려·유학자 지식인의 절실한 현실 인식이 담겼다. 이들은 특히 종전과 동시에 시작된 몽골제국의 간섭을 목도하면서 국가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고민했다. 고려 특유의 외교 역량을 발휘해서 가까스로 국가를 지켜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그때까지 고려 사람들이 알던 나라들(금·서하·남송)은 모두 몽골에 멸망했고, 일본과 안남(베트남)은 몽골의 공격을 막는 데 성공했지만 언제까지 버틸지 알 수 없었다. 전쟁에 지고 외교로 지킨 나라는 고려가 유일했다. 일연과 이승휴는 고려의 국가 유지가 역사적으로 당연한 일임을 입증하고자 했다. 『제왕운기』에는 단군신화 앞에 “요동에 따로 천하가 있으니, 뚜렷이 중국과 구분된다”라는 문장을 배치했다. 요동과 한반도는 본래 중국과 다른 세상이며, 따라서 고려가 몽골과 다른 나라인 것이 당연하다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 ‘다른 세상’의 역사를 조선부터 시작하면서 단군신화를 기록했다.

삼척의 천은사.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저술한 간장사(看藏寺)가 현재 천은사 경내일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삼척시]
『삼국유사』는 단군왕검의 건국 사실을 기록하면서 “요임금과 같은 때였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요임금은 당시 고려 사람들의 지식으로는 중국에서 최초로 나라를 세운 사람이었다. 단군과 요의 건국 시기가 같다면, 조선에서 시작하는 우리나라 역사와 요 임금에서 시작하는 중국의 역사가 출발부터 다르며, 지금 고려와 몽골이 서로 다른 나라인 것도 당연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역사에서 조선을 되살림으로써 현재의 고려를 살리고자 했던 것이다. 일연과 이승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에서 고구려·백제·신라를 거쳐 고려로 이어지는 역사를 연결했다. 이제 조선은 이야기 속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 역사의 출발점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으며, 삼한보다 강력한 구심력으로 삼국 분립 의식을 해소하는 데 기여했다.

『삼국유사』에서 조선에 대해 기록된 부분. 단군이 세운 조선을 훗날 위만조선과 구분해서 고조선이라고 했다.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고려 말 1370년에 고려군이 압록강 국경을 넘어 요동의 동녕부를 정벌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선무공작의 일환으로 방을 붙여 “우리나라는 요임금과 동시에 세워졌으며, 요하 동쪽의 영토를 대대로 지켜왔다”고 선포했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나온 내용이 고려의 공식적인 역사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그 무렵 사람들은 나라의 운명이 다했음을 알았다. 그들은 고려보다 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었고, 새 나라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역사 속에 잠들어 있던 조선을 되살려 새나라 조선을 만들었던 것이다. 모든 시대는 역사 속에서 자기 사명이 있다. 막강한 몽골의 침략에서 나라를 지켰고, 뿌리 깊은 분립 의식을 불식시켜 마음속의 통일을 이루었으며,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까지, 고려는 ‘역사적 사명을 다한 나라’였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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