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 방탄소년단이 공연을 한다는데, TV를 아무리 찾아봐도 안 나오더라.” 우연히 만난 80대 어르신이 지난 21일 광화문에서 열린 방탄소년단(BTS)의 컴백 라이브 이야기를 꺼냈다. 아마도 어르신은 방탄소년단은 잘 몰라도 이들을 위해 서울시가 광화문 한복판을 내줬다는 사실은 알았을 거다. 당연히 ‘얼마나 대단하길래...’ 하는 궁금증을 가졌을 테고. 하지만 어르신은 궁금증에도 방송을 볼 수 없었다. 넷플릭스가 아닌 KBS, MBC 같은 지상파에서 공연이 생중계될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과거라면 광화문을 내주는 공연은 당연히 국가적인 차원에서 가능한 일이었고, 그건 공영방송이 생중계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광화문 한복판에서 아이돌 그룹의 복귀 공연이 펼쳐지고 그것을 지상파가 아닌 넷플릭스가 전 세계 190개국에 생중계하는 광경은 여러모로 이례적이다. 이 이례적인 사건은 이미 글로벌 환경에 들어와 과거와는 전혀 달라진 K컬처의 현 위치를 보여준다. 그 글로벌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글로벌 OTT 넷플릭스는 어떤 야심을 갖고 있고, 그것은 K컬처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있을까.
글로벌 OTT와 K컬처의 동거
새로운 문화로 가는 포털 제시
세계 대중, 같은 취향으로 뭉쳐
국가 경계 갇히지 않는 관점 필요
글로벌 지상파가 되려는 넷플릭스 야심
BTS의 컴백 라이브 공연 하루 전, 넷플릭스는 사전 미디어 브리핑을 열었다. 여기서 넷플릭스 논픽션 시리즈 및 스포츠 VP인 브랜든 리그(Brandon Riegg)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내놨다. 그는 넷플릭스의 글로벌 라이브 방송의 비전이 ‘지상 최고의 순간을 모두가 함께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전 세계에 너무나 많은 엔터테인먼트와 볼거리들이 넘쳐나는 세상이고 그래서 전 세계가 동시에 연결될 수 있는 기회가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는 게 그 이유다. 지난 1월 등반가 알렉스 호놀드가 대만 타이베이의 빌딩을 맨손으로 등반하는 ‘스카이 스크레이퍼 라이브’가 같은 비전으로 진행된 글로벌 생중계였다. 어떤 순간을 다 함께 시청한다는 걸 지상파 시절에는 ‘본방사수’라고 불렀다. 그 동시간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는가에 따라 시청률이 기록되던 시대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 본방사수의 개념을 깬 게 사실 VOD(주문형 영상 서비스) 개념으로 선택적 시청이라는 콘텐트 소비 방식의 변화를 일으킨 넷플릭스가 아닌가. 그런데 넷플릭스는 이제 본방사수까지 접수하려 한다. 물론 전 세계 190개국이 같이 하는 본방사수다. 글로벌 버전의 지상파라고 해야 할까. 넷플릭스는 이제 글로벌 라이브라는 과거 로컬 공영방송들이 했을 법한 일들을 벌이며 전 세계인들의 주력 미디어가 되려 한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K컬처의 매력 그리고 이 야심에 K컬처는 중요한 조력자로 등장한다. 이미 대만에서의 맨손 등반 이벤트가 있었지만, BTS 컴백 라이브가 실질적으로 이 야심을 전 세계에 선언하는 모양새를 띤 건 우연이 아니다. 물론 라이브 방송은 기대만큼 완성도 높게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거의 유일하게 인상적이었던 오프닝 영상은, 전 세계가 바라보는 K컬처의 특징과 이를 넷플릭스가 어떻게 담아내 글로벌한 성과를 내려 하는가에 대한 전략을 읽기에 충분했다.
아주 짧게 보여졌지만 경복궁 근정전에서 광화문 광장으로 나아가는 부감샷 오프닝은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비벼내 기발한 맛을 내는 K컬처의 특징 그대로다. 데스서바이벌 장르에 한국의 놀이문화를 섞고(오징어 게임), 조선시대판 좀비물(킹덤)을 내놓으며, 한식에 파인다이닝을 더하는 요리 서바이벌(흑백요리사)을 내놓는 게 K컬처다. K컬처 안에서는 공간적으로 동양과 서양이 만나고, 시간적으로는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다. 이 세계는 그래서 시공간을 넘나들고 혹은 겹쳐지기도 하는 ‘포털(통로)’ 같다. BTS 컴백 라이브 공연에 세워진 거대한 사각형 구조물은 아마도 그 포털을 상징하는 것이었을 게다. 그 포털을 통해 전통(경복궁)과 현대(광화문 광장)가 겹쳐지고 그 사이로 전통의상을 현대화한 옷차림의 BTS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광경을 세계 각국에서 온 팬덤 아미가 한자리에 모여 환영한다.
만일 그 포털 모양의 검은색 사각형 구조물에서 넷플릭스가 시작될 때 ‘투둠’하며 보이는 로고가 떠올랐다면 제대로 본 것이다. 그것이 이번 BTS 컴백 라이브라는 K컬처의 정점을 전 세계에 라이브로 연결하면서, 이제 넷플릭스가 그 시공간을 넘나드는 콘텐트의 포털로 거듭나겠다는 선언이니 말이다. 이러한 비전을 가진 넷플릭스에게 동서양이 결합하고 시공간을 뛰어넘는 콘텐트의 퓨전에 가장 빠르게 적응하고 있는 K컬처만큼 매력적인 건 없다.
K컬처와 경계인, 글로벌 협업의 새 양상 넷플릭스와 유튜브로 대변되는 글로벌 OTT들은 2016년을 기점으로 한국에 본격 상륙했고, 이를 기점으로 K컬처도 글로벌 컬처가 되었다. BTS는 빌보드를 장식했고,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석권했으며, ‘오징어게임’이 글로벌 신드롬을 만들었는데,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존재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글로벌 비전의 비즈니스들이 K컬처와 만나 시대를 바꾸는 시너지를 만들었다. 여기까지는 이른바 ‘국위선양’이라는 다소 예스러운 표현이 그럴듯하게 여겨졌고 한국인들은 절로 어깨가 으쓱해졌다.
하지만 이 연장선에서 등장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글로벌 신드롬은 이 국가적 개념을 가진 ‘국위선양’이라는 표현이 어딘가 어색하다는 걸 느끼게 했다. K팝과 전통의상을 입은 무녀가 등장하고, 컵라면부터 한의원, 목욕탕, 남산타워 등등의 한국문화가 담겨 있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엄밀히 말해 넷플릭스가 투자하고 소니 픽처스가 만든 작품이다. 왜 한국에서 이런 작품이 나오지 않았는가에 대한 아쉬움은, 왜 한국에서는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없는가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졌다. 한국문화에 대해 국뽕으로 치우치거나 혹은 냉소적인, 양극단의 입장을 갖는 한국인들은 적당한 거리에서의 존중을 담는 이런 작품을 만들어내기 어려웠을 거라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결국 K컬처가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이 양극단의 균형을 잡아줄 수 있는 글로벌 협업이 필수라는 걸 이 작품은 보여줬다.
한국계 캐나다인으로서 ‘경계인’의 정체성을 가진 매기 강 감독은 이러한 글로벌 협업을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그녀가 남긴 수상 소감은 그래서 의미심장한 경계인의 선언처럼 들렸다. “대한민국께, 그리고 모든 곳에 있는 한국인들께 이 영광을 바칩니다(This is for Korea, and Koreans everywhere).” 이 말을 곱씹어보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분명 아시아에 존재하지만, 한국인은 이제 그곳에서만 사는 이들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곳 바깥에서 K컬처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여기는 모든 경계인이 한국인이라는 걸 매기 강 감독은 에둘러 표현했다.
전 세계와 협업되고 공유되는 K컬처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OTT의 야심 위에 시공간을 넘나드는 독특한 매력으로 급성장한 K컬처는 이제 매기 강 감독의 ‘경계인 선언’처럼 새로운 기로에 서게 됐다. K컬처는 더 이상 한국이라는 공간적 경계 안에서 만들어져 해외로 ‘진출’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또 한국인들만을 위한, 한국인들만에 의한, 한국인들만의 문화도 아니다. 전 세계와 협업하고 공유되는 문화다. 이런 변화는 광화문광장도 알고 있다. 이 광장은 더 이상 1987년 민주화 운동과 2002년 월드컵에 머물러 있지 않다. 한국인들만이 모이는 곳이 아니고, 전 세계인들이 BTS 같은 K컬처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곳이다. 우리들만의 광장이 아닌 것이다(그러니 광장 사용법도 달라져야 한다). 또한 한국인의 범주도 확장된다. 전 세계의 매기 강 같은 경계인들은 이제 K컬처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들이다.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OTT와 K컬처의 동거는 새로운 글로벌 문화로 가는 포털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K컬처는 광화문 한복판에 전 세계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위상과 자신감을 갖게 됐지만, 이 새로운 시대의 비전이 국가 같은 과거의 틀에 머물러서는 실효를 얻기 어렵다는 걸 아직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 새로운 시대에 국가의 자리에 세워지는 건 같은 취향으로 뭉쳐지는 글로벌 대중이다. K컬처의 비전은 그래서 ‘국위선양’ 같은 국가적 틀을 넘어서는 글로벌 대중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고 묶어내는 지점에 있지 않을까. 광화문 한복판에서 시작해 글로벌로 이어지는 K컬처 포털의 문은 이미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