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왜 보통의 액체와 달리 위부터 얼까.’
일반인들은 당연하다고 느끼는 이 현상은 과학계에선 수십 년째 그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하지 못한 미스터리였다. 김경환 포항공대(포스텍) 교수 연구팀은 지난 10년간 끈질기게 매달린 끝에 이 난제를 풀었다. 학계에서는 이번 연구 결과가 교과서 내용을 바꿀 만한 성과라고 평가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김 교수 연구팀이 스웨덴 스톡홀름대 앤더스 닐슨 물리학과 교수 연구팀과 공동으로 물의 ‘액체·액체 임계점’을 세계 최초로 관측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 성과는 세계 최고 권위의 학술지인 사이언스지에 27일 게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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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에게 가장 이상한 액체 ‘물’
우리에게 익숙한 물은 과학자들에겐 ‘가장 이상한 액체’다. 특히 보통의 액체는 밑 부분부터 어는 반면, 물은 위부터 언다. 물이 이런 독특한 특성을 가지게 된 원인은 물이 4℃에서 가장 무거운 성질을 가져서다. 차가운 공기에 닿은 표면의 물은 4℃가 되면 무거워 바닥으로 내려가고, 표면에는 가벼운 0℃의 물이 올라오면서 위부터 얼게 되는 거다.
과학계에선 이런 현상의 원인을 명확히 규명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유력하게 제기됐던 게 ‘액체·액체 임계점’ 가설이다. 겉보기엔 모두 똑같아 보이지만 물은 무거운(고밀도) 물과 가벼운(저밀도) 물이라는 두 종류의 상태로 공존하며, 특정 온도(임계점)에 도달하면 그 차이가 사라진다는 가설이다. 학계에서는 물의 수수께끼 같은 성질들의 근원이 이 임계점 근처에서 발생하는 영향력 때문이라고 봤다. 그리고 이 임계점이 존재한다면 영하 40~70℃ 사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으로 예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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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70℃에서도 얼지 않은 물 만들어 측정
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임계점을 실제 관측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문제는 물은 영하 40℃ 이하에선 매우 빠르게 얼어버리기 때문에 실험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연구팀은 높은 압력에서 제조된 비정질 얼음(액체처럼 무질서한 분자 배열을 간직한 얼음)을 적외선 레이저로 가열해 영하 60~70℃에서도 얼지 않은 상태의 물을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실마리를 찾았다. 이때 만들어진 10억분의 1g에 불과한 극저온의 물은 100만 분의 1초 안에 얼어버리기 때문에 연구팀은 10조분의 1초 단위로 분자의 움직임을 측정할 수 있는 ‘X선 자유전자 레이저’(포항 4세대 가속기)를 이용했다. 찰나보다도 짧은 순간에 물의 구조를 측정해 낸 비결이다. 그 결과 연구팀은 물의 ‘액체·액체 임계점’이 영하 60℃ 부근에 있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관측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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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물’ 미스터리 푼 교수
김 교수는 지난 10년간 이 문제를 풀어왔다. 2017년엔 영하 45℃ 이하에서도 얼지 않은 물을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고, 2020년에는 영하 70℃에서도 물이 고밀도와 저밀도 두 개의 액체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김 교수는 “누구나 익숙하다고 생각한 물의 특성을 그 누구도 규명하지 못했다는 점에 끌려 10년 전 물 난제 풀기에 도전하게 됐다”며 “임계점을 찾는 과정은 마치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앞으로 임계점을 더 정밀하게 밝혀내는 후속 연구를 이어갈 계획이다. 현재 연구팀이 밝혀낸 임계점은 ‘영하 60℃±8℃’인데, 이 오차 범위를 더 좁혀나는 게 목표다. 이번 연구 결과는 물이 생명 현상에 필수적인 물질이 된 근원을 규명하고, 물의 성질을 이용한 기후 변화·생체 분자 등 기초·응용 연구의 정확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김 교수는 “산업 현장이나 연구실에서 물의 특성을 활용한 공정과 연구에서 정확도를 궁극적으로 향상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기초 연구 성과가 가져올 파급력은 현시점에서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